살아있는 것은 모두 목적을 가진다. 이 목적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방향이 행동을 규정한다. 하늘을 나는 해오라기도, 물밑을 기는 달팽이도, 그리고 사람의 의지가 작동하는 기차와 버스, 운하 또한 그러하다. 행동은 목적에 부합하게끔 조정된다. 합목적성에 따라 효율적으로. 영업사원이 사람을 만나고, 수험생이 도서관에 가고, 축구선수가 뛰어오르는 것, 그리고 연구자의 독서에도. 목적 성취의 의지가 강할수록 효율성은 강조되고, 모든 사고와 감각은 목적을 위한 행동으로 수렴된다.
물을 주시하는 왜가리에게 갈대꽃은 보이지 않고, 이동하는 무리 속 기러기에게는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합목적성의 존재이다. 높은 점수가 필요하 수험생이 시어를 통해 시인의 내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무익하거나 유해한 것으로 간주된다. 무리 속에서 이동하던 늑대가 석양에 매료되어 멈춰서거나, 초원의 기린이 꽃 향기에 취해 눈을 감는 것는 목숨을 내놓는 짓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순간순간은 큰 흐름의 일부로 귀속될 뿐이다.
우리의 감각은 매 순간 살아있고, 우리의 지각과 인식은 끊임없이 달라지지만, 그 대부분의 감각과 인식은 소멸되고 망각된다.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의 삶이란, 몇 개의 목적을 향해 가는 매우 단조로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집에서 학교나 직장을 가고, 고등학교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에서는 취업을 준비한다. 새 자동차나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한다. 목적에 빠르고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직선으로 가야 하며 중간에 멈칫거리면 안 된다. 과녁 밖에 이르는 것은 실패로 간주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씩 멈춰 선다. 동시에 시간도 잡아 세운다. 그리고 맥락과 관성에서 벗어나와 어디론가 사라진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일순 공중에 멈춘 채로 땅 위의 제비꽃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순간 순간 목적과 방향이 사라지는 것이다. 늑대는 석양 빛에 매료되어 동료들을 잃고, 꽃 향기에 취해 있는 기린에게 사자 무리가 접근한다. 그래도 그 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왜?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저녁 노을을 보며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 미적 체험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저승을 다녀오는 것, 죽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 일종이다.
그런데 이 순간 순간은 되돌아갈 수 없으며(불가역성), 되풀이되지 않는다. (일회성) 어느 여름 날 몽환 속에 있는데 인기척이 있어 나가보니 용궁의 사신이 와 있었다. 길을 가다가 낯선 여인에게 반해 뒤를 따라갔고, 말을 걸었더가 사랑까지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귀신이었다. 이 사건들은 절대로 다시 체험되지 않는다. 아무리 나오면서 표시를 해놓아도, 지리산 청학동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