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수를 줍다 (난설헌과 주숙진)

검하객 2016. 2. 4. 00:28

 지금은 구경하기 힘들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들을 다니며 낙수를 줍는 풍경이 자주 빚어졌다. 수확을 하다보면 흘려지는 게 있기 마련이고, 추수가 끝난 밭을 뒤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난한 시절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밭을 뒤졌고, 형편이 좋아진 뒤에는 재미삼아 그렇게 하기도 했다. 글을 한 편 읽으면 과자 먹은 자리처럼  부스러기가 널려있고, 옷을 한 벌 짓고 나면 남은 천들이 주변에 어지럽다. 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무 한 줄기가 자라면 여러 가지가 생기고, 지방에 출장을 가면 여행과 식도락이 뒤따르며, 홍어를 잡으려고 쳐놓은 주낙에 우럭이 올라온다. 모모 학회지 논문 두 편을 심사했다. 출력해놓은 논문을 폐기하기 전에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된 두어 가지를, 꼴 베다가 주어온 새알처럼 챙겨놓는다.

 

  허난설헌 (1564~1589), 허균(1569~1618)보다 다섯 살 위 누이이다. 난설헌이 26살에 죽었을 때 허균은 21살이었다. 다음은 " 구슬이 깨어지고 진주는 떨어지니 毁璧兮隕珠"로 시작하는 <毁璧辭>의 서문이다. " 나의 돌아간 자씨는 현숙하고 문장도 지녔으나,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고 또 두 자식까지 잃어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늘 생각하면 몹시 슬퍼하길 마지 아니하였는데 황산곡의 사(辭)를 읽어보자 그 홍씨(洪氏) 누이를 애통해 하는 정이 애절하고 구슬프니 천 년이 지난 오늘 동기간의 슬픈 정이 이와 같이 서로 같았다. 그러므로 그 글을 본받아 슬픔을 토로한다."
  송나라 때에 朱淑眞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李淸照, 魏夫人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南宋 魏仲恭은 <斷腸詩集> 서문에서 주숙진을 이렇게 소개했다. 蚤歲, 不幸父母失審, 不能擇伉儷, 乃嫁爲市井民家妻. 一生抑鬱不得志, 故詩中多有憂愁怨恨之語. 每臨風對月, 觸目傷懷, 皆寓於詩, 以寫其胸中不平之氣. 竟無知音, 悒悒抱恨而終. 自古佳人多命薄, 豈止顏色如花命如葉耶? 觀其詩, 想其人, 風韻如此, 乃下配一庸夫, 固負此生矣! 其死也, 不能葬骨于地下, 如青冢之可吊, 并其詩爲其父母一火焚之.今所傳者, 百不一存, 是重不幸也.”

 

  다음은 난설헌의 <閨怨>인데 뒤의 두 구절씩이 모두 좋다. 

 

 錦帶羅裙積淚痕, 一生芳草恨王孫. 瑤箏彈盡江南曲, 雨打梨花晝掩門. 

 月樓秋盡玉屏空, 霜打蘆洲下暮鴻. 瑤瑟一彈心不見, 藕花零落野塘中.

 

 다음은 주숙진의 <自責> 1,2인데, 말이야 겸허하나 여간한 이 아니었음이 절로 드러난다.

 

  女子弄文誠可罪, 那堪詠月更吟風. 磨穿鐵硯非吾事, 繡折金針卻有功.

  悶無消遣只看詩, 不見詩中話別離. 添得情懷轉蕭索, 始知伶俐不如癡.

 

  난설헌은 遊仙詩를, 주숙진은 詠史詩를 지었다. 난설헌의 유선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下視東海水, 澹然若一杯.

  琴成彈一曲, 擧世無知音. 所以廣陵散, 終古聲堙沈.

 

   다음은 주숙진의 <항우>이다.

 

   蓋世英雄力拔山, 豈知天意主西關. 范增可用非能用, 徒嘆身亡頃刻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