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폭풍
2월에 워더링 하이츠에 잠깐 들렀다. 목단강에서 돌아와 드러시크로스 집에 갔더니 엘렌 부인이 있었다. 나는 떠나온 곳과 이른 곳, 책임감과 무의미, 불통 언어의 하나 둘 의미와 다 들리는 언어의 무의미 사이에서 부유하느라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 비오고 바람 불던 날 밤, 왠일인지 떠돌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엘렌 부인에게 안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부인은 잔 두 개를 놓았다.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1847)
에밀리 브론테((1818~1848) / 김종길, 민음사, 2012
히스클리프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도 자신의 나이와 이름과 고향을 알지 못한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인 언쇼가 리버플에 출장 갔다가 데려온 집시 거지 소년이다. 언쇼가 이 소년을 데려온 이유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언쇼는 이 소년을 사랑한다. 심지어 자기 아들인 힌들리보다도 더. 힌들리는 아버지에 대들지 못하지만 이 처사에 마음속 깊이 반발한다.
이에 반해 캐서린은 - 아버지 언쇼처럼 - 히스클리프와 잘 맞았다. 하루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놀러갔는데, 여기서 캐서린만 대접을 받고 히스클리프는 린튼과 이사벨라 남매에게 모욕을 받고 쫓겨난다. 불행히도 언쇼가 죽고, 워더링 하이츠는 힌들리의 수중에 들어간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박대한다.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의 생활을 버티지만, 캐서린과 린튼의 결혼이 결정되자 집을 나간다.
캐서린과 린튼 에드가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에서 그런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면서 이 일상의 모든 균형과 안정은 파탄 나기 시작한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가 힌들리를 파멸시키고, 캐서린 앞에 나타나 그녀를 파멸시키고,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그녀마저 파멸시킨다. 그리고 캐서린과 린튼의 딸인 캐시와 자기의 병약한 아들을 결혼시킴으로써 드러시크로스의 모든 재산을 차지한다.
히스클리프는 사랑하는 여인의 딸이자 병약한 아들을 악용하여 혼인시킨 며느리인 캐시를 워더링하이츠로 옮겨 살게 한다. 이 집에는 히스클리프가 힌들리에게 당한 방식으로 복수하며 키운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그의 사촌 누이인 캐시, 히스클리프, 그리고 툭하면 성경을 들먹이는 위선적이고 교활한 하인 조셉 등이 부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드러시크로스 집을 임대한 ‘나’는 주인을 만나기 위해 워더링 하이츠에 들렀다가 이 기묘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의문이 생긴다.
4회부터 30회까지는 워더링하이츠에서 힌들리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가정부(유모의 딸)로 두 집안 사연들을 잘 알고 있는, 그럼에도 책을 많이 읽어 교양이 있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뛰어난 엘렌 딘 부인이 ‘나’인 록우드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원래 조용한 휴양차 이곳을 찾았던 ‘나’는 이 마을의 음산한 분위기에 질려 드러시크로스 집을 떠났다가 10개월쯤 뒤에 우연히 돌아온다. 엘렌 딘 부인은 1년이 채 못 된 시간에 벌어진 일들을 다시 들려준다.
정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워더링하이츠에서는 언쇼, 힌들리 부부, 린튼, 히스클리프가, 드러시크로스에서는 노부부, 린튼 에드가, 캐서린이 차례로 죽는다. 이사벨라도 런던 부근에서 죽는다. 이들 중 늙어 죽은 이는 노부부뿐이다. 이곳에서 저승은 아주 가까이에 있고, 그곳에 닿기는 매우 쉽다. 이들은 대부분 죽음에 순응하거나 추종한다. 거역하거나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인물은 엘렌 딘, 질라, 조셉 등의 하인과, 하인처럼 자란 헤어튼, 그리고 엄마가 죽기 두 시간 전에 칠삭둥이로 태어난 캐서린 에드가 뿐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30살에 이 소설을 출판하고 이듬해 죽었다.
이 정원에 폭풍이 몰아친다. 히스클리프는 어디에선가 불어온, 기원을 알 수 없는 폭풍이다. 이 폭풍은 안정되고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전복시킨다. 폭풍은 모든 것을 파탄 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뒤바뀐다. 주객이 바뀌고 선악의 기준도 무너진다. 히스클리프의 행동은 상처 입어 사나워진 악마의 냉정하고 음흉한 복수이고, 그것의 기원은 남달리 풍부하지만 표현과 발산이 억제된 내면의 폭풍이다. 그래서 알 수 없고 견디기 힘든, 모든 것이 뒤바뀌고 뒤틀리는 세상이 폭풍의 언덕인 셈이다.
캐서린은 천당(린튼 에드가)과 지옥(히스클리프) 사이에서 갈등한다. 린튼 에드가는 교양과 전통과 부유 속에 있고, 히스클리프는 강인한 야성과 마성을 지녔다. 캐서린의 야성과 마성은 교양과 윤리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천당을 선택한 그녀에게 지옥이 찾아온다. 그녀의 지반이 송두리째 뒤집어진다. 히스클리프의 지옥은 캐서린의 지옥을 끌어당긴다. 린튼 에드가의 천당은 질투하고 괴로워한다. 둘 사이에서 캐서린은 정신착란에 시달리다가 죽고 만다. 죽어가는 愁心態와 瘦瘠美의 캐서린은 林黛玉을 연상시켰고, 린튼과 히스클리프에 사이에서의 갈등은 水路夫人의 그것과 닮았다.
캐서린이 죽기 2시간 전에 낳은 딸 캐서린 히스클리프는 엄마를 빼어 닮았으면서 동시에 히스클리프의 냉정한 마성을 배워 익혔다. 히스클리프 부자의 계략에 빠져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워더링 하이츠의 무력한 며느리로 전락한 그녀는, 사촌 오빠인 헤어튼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히스클리프에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모든 복수를 마친 히스클리프는 허무와 무력감에 빠진다. 이런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폭풍은 캐서린에 대한 감정이다. 그는 그 억제할 수 없는 폭풍 속에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