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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마지막과 子貢

검하객 2016. 8. 8. 07:41

 

  사마천은 <孔子世家>에서 공자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공자가 병이 들었다.(73세)  子貢이 뵙기를 청했다.(42세) 공자가 지팡이를 짚고 문가로 나오며 말했다. “, 어째 이리 늦었는가?” 이어 탄식하며 태산은 무너지고, 대들보와 기둥은 부러졌으며, 철인은 병들었구나!”라 읊조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자공에게 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거늘 나를 받들어주는 이가 없구나. 하나라 사람들은 관을 동쪽 섬돌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두었지. 어제 꿈에 나의 관이 두 기둥 사이에 있더군, 나의 조상은 은나라 사람이야.” 이레 만에 죽었다

明歲, 子路死於衛. 孔子病, 子貢請見. 孔子方負杖逍遙於門, , 汝來何其晚也孔子因歎, 歌曰太山壞乎梁柱摧乎哲人萎乎因以涕下. 謂子貢曰天下無道久矣, 莫能宗予. 夏人殯於東階, 周人於西階, 殷人兩柱閑.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閑, 予始殷人也.” 後七日卒.


 스승님을 두고 어찌 먼저 죽을 수 있냐던, 공자가 그토록 마음을 다해 아꼈던 顔回는 3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회는 죽을 때까지 가난했고, 스승은 제자를 가난에서 구제해주지 못했다. 내면 수양에 전념했던 안회는 세상에 팔기 위해 내놓을  것이 없었고, 공자는 그런 안회를 좋아했지만 그 가난에는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子路는 衛나라의 정사에 참여하여 자기 기질대로 행동하다가 정쟁 중에 희생되었다. 한해 전의 일이다. 공자는 진작부터 자로의 기질을 걱정했지만, 그것을 변화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그저 나약하고 무력한 일개 선생에 지나지 않았다.

제자가 3천이니 72니 하지만, 예나 오늘이나 그건 허수일 뿐이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제자는 子貢 뿐이었다. 자공은 스승의 마지막을 지켰고, 공자는 제자에게 마지막 심중을 털어놓았다. 공자는 자신의 실패를 탄식하며, 자신이 그토록 극복하려 했던 殷나라의 후예임을 자각하며 죽어갔다. 자공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동문들에게 부고를 띄웠다. 그는 스승에게서 수시로 안회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고, 마음속에 있었을 서운함을 내색하지 않은 채 끝까지 스승을 섬겼다. 공자의 사후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전한다.  


공자를 노나라 도성 북쪽 泗水 가에 장사지냈다. 제자들이 모두 3년을 복상했다. 3년 심상이 끝나자 모두 헤어져 떠나가며 곡을 하여 각자 다시 애도를 다했다. 어떤 사람은 다시 머물렀다. 자공만은 무덤 가에 여막을 짓고 6년을 복상한 뒤에 떠나갔다.

孔子葬鲁城北泗上, 弟子皆服三年. 三年心丧毕, 相诀而去, 则哭, 各复尽哀或复留. 唯子貢庐于冢上, 凡六年, 然后去.


공자가 죽기 전 3년 동안 안회(482), 아들 鯉(481), 자로(480)가 잇달아 죽었다. 자공은 護喪이면서 喪主 역할도 했을 것이다. 당시의 사실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사마천의 말을 믿는다면, 자공은 42세에서 48세까지 服喪한 셈이다. '廬於塚上'이 과연 6년 동안 꼬박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인가? 40대의 6년 동안을 모든 사회 활동을 접은 채 오로지 돌아간 스승을 위해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나로서는 모두 경이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