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멈춰서 생각하라

검하객 2016. 8. 10. 17:15

   학위 받고 10년은 취업을 위해, 취업후 5년은 유지를 위해 성과주의에 매몰되었다. 기준과 한계 없는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했기 때문에 중단하거나 머뭇거리면 안 되었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 또한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에 극도로 억제되었다. 무엇인가를 읽거나 쓰지 않으면 불안해졌고,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최소화했다. 멈출 줄 모르는 기계가 된 것이다. 실체가 숨겨진 강요 속에서 나는 나를 착취해왔다. 그러면서 사색을 잃어버렸다. 거대한 찜통 속에서 헐떡거리며 나는 잠시 모든 행위를 멈춘다. 그리고 지나온 곳과 있는 곳과 갈 곳을 가늠해본다. 즉각적 반응과 무한긍정 활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생각하고 머리를 저으며 부정한다면, 곧 폭주하는 속도에 뒤쳐지고 작용하는 힘의 궤도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혼자 뒤쳐져 천천히 걷는 것과 궤도 밖을 부유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폭주하게 한다. 해일처럼 사람들은 앞물결을 좇고 뒷물결에 몰려 어디론가로 몰려가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멈추고 오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니체 / 김정현, "도덕의 계보")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니체, "우상의 황혼")

 

사색적 삶은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말한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이나 신경질과 구분된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한병철 /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 2013, 47~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