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浪과 碣石山
5장 「위만조선 · 한사군 · 창해군」, ‘1.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2004
1. "사기", '조선열전'에는 기원전 108년 조선을 멸망시키고 四郡을 설치한 사실만 언급되었다. 4郡의 명칭은 『한서』 권 95, 「서남이양오조선전, 조선전」에 보인다.
2. "한서", '五行志'와 '地理志'에 따르면 현토는 1년 뒤에 설치되었다. 현토는 한나라 기준 동쪽 먼 곳에 위치하였다. (*. 진번과 임둔은 기원전 82년에 폐쇄)
3. 魏晉시기 朝鮮縣은 北平郡에 속해있다가 肥如縣으로 옮겨갔다. ( * baidu 북평군은 내몽골, 비여현은 遼西郡의 治所로 노룡현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4. 遂城縣은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 수성현에는 秦長城이 시작되는 碣石山이 있었다. 갈석산의 소재지는 肥如縣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5. 肥如縣의 玄水와 海陽縣의 龍鮮水는 모두 濡水의 지류였다. 그런데 濡水는 灤河의 옛 이름이다. 난하는 옛 遼水이다. 요서와 요동의 기준은 이 요수, 즉 지금의 난하였다.
6. 낙랑군 수성현은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었다. 낙랑군은 당연히 이 지역을 포괄한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어야 한다. 수성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했던 조선현도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어야 한다.
7. 한사군은 갈석산을 기점으로 그 동쪽에 설치. 갈석산이 수성현에 있었기 때문에, 수성현은 낙랑군의 가장 서쪽. 위만은 동쪽으로 영토 확장, 현토는 한사군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었다.
⇒ 이른 시기 사료를 정밀하게 검토하면 樂浪과 玄莵 등의 위치와 영역을 추산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서쪽 경계는 秦 長城이 시작되는, 碣石山이 있는 고을이다. 진 장성이 시작되는 곳은 遂城縣이었다. 수성현은 낙랑군에 속했다. (* 어떤 문헌은 碣石山이 肥如縣에 있다고 전한다. 비여와 수성은 서동으로 인접한 고을이었을 것이다.) 수성현은 낙랑군의 가장 서쪽 고을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성현은 지금의 盧龍縣 서쪽 3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baidu) 현재 갈석산은 거기서부터 동남쪽 70km 떨어진 昌藜縣에 있다. 일제강점기 일인 학자들이 고고학의 성과를 토대로 평양 낙랑설을 주장했고, 이 주장은 이병도를 통해 서울대 국사학과로 이입되었고, 외국인의 학설은 무조건 받아 적고 스승의 견해에는 반기를 들지 않는다는 불문율의 도움으로 확대 재생산 고착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의 모든 역사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浿水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樂浪으로 옮겨간다. 조조가 읊은 "東臨碣石觀滄海"의 갈석이 바로 갈석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