巫蠱의 禍(wūgǔzhīhuò)와 任安 , 기원전 91년
巫蠱의 禍(wūgǔzhīhuò)와 任安 , 기원전 91년
巫蠱는 원망하는 사람의 오동나무 인형을 땅에 묻어 저주하는 무속의 방술이다. 92년, 한무제는 한 남자가 칼을 차고 建章宮 龍華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체포에 실패했다. 대로하여 궁문 담당자를 처형했다. 11월 군사를 동원하여 상림원 대수사를 단행했다. 11일 뒤에 해제, 무고 사건이 시작되었다.
승상 公孫賀의 부인 衛君孺는 衛皇后의 언니, 때문에 公孙贺는 총애를 받았다. 공손하의 아들 公孙敬는 아버지에 이어 太僕을 맡았다가 공금 횡령으로 하옥되었다. 이 무렵 무제는 협객 朱安世를 긴급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공손하는 주안세를 체포하면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손하는 주안세를 체포했다. 주안세는 승상의 집안이 화를 입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주안세는 옥중에서 상서하여, 공손경과 양석공주의 사통 사실, 甘泉宮 가는 길에 巫蠱를 행했던 사실을 발설했다. 91년 1월, 공손하 부자는 옥사하고 멸족되었다. 피해는 위씨 일족에 크게 미쳤다. 무제는 涿郡太守 劉屈氂를 승상에 임명했다.
당시 궁궐에는 巫蠱가 크게 유행했다. 무제는 이 일에 연루된 후궁, 비빈, 궁녀와 대신 수백 명을 처형했다. 무제의 의심 증식.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수천 명의 木頭人 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치려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이로부터 몸이 약해지고 기억력 감퇴. 태자 · 위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江充은 황제가 연로할수록 걱정이 많아졌다. 강충은 태자궁 근처에 미리 많은 나무 인형을 묻어두고, 무제의 병이 巫蠱 때문이라 일러 태자를 압박해나갔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7월, 궁지에 몰린 태자는 강충 부자를 유인하여 살해하고, 그 수하의 胡人 巫師 수십 명도 불태워 죽였다. 황궁 무기고에서 무기들을 반출하고 장락궁의 군사들을 징발하였다. 장안에는 태자 모반설이 분분했다. 무제는 사신을 보내 태자를 불러오게 했지만, 사신은 장안에 들어가지 않은 채 태자의 반역을 보고했다. 무제는 성문을 굳게 지켜 반군이 장안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태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北軍을 거두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당시 護北軍使者는 任安이었다. 태자는 임안을 불러 符節을 주고는 군사를 발동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임안은 엎드려 부절을 받고 군영으로 돌아와서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태자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군사를 모아 長樂宮 서문 밖에서 승상 劉屈氂의 군대와 격돌했다가 패배했다. 무제는 임안에게 두 마음이 있었다고 판단하여 요참형에 처했다. 무제는 태자의 사면을 요청하는 상소를 받고 마음이 흔들렸으나 끝내 사면령을 내리지 않았다. 태자는 동쪽으로 달아나 湖县 泉鸠里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고, 8월 8일 자결했다. 황손 두 명도 함께 죽었다.
任安은 감옥에 갇혀 형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에게 자신을 변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마천은 그 전에 이미 宮刑을 받은 터였다. 사마천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편지가 임안에게 전달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편지는 <報任少卿書>라는 제목으로 "한서", '사마천열전'에 실려 있다. 褚少孫은 한나라 元帝(49~33) 成帝(33~7) 시기에 활약했던 文士인데, "史記" 중 결락된 부분을 '褚先生' 이란 이름으로 채워넣었다. 그는 <田叔列傳>의 '太史公曰' 다음에 任安의 전을 보충하였다. 田叔의 아들 田仁은 '巫蠱의 禍'에, 장안성 覆盎門을 지키다가 패주하던 태자를 통과시켜주었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아래는 저소손이 지은 任安의 傳이다.
임안(任安)은 형양(滎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했다. 남의 수레를 몰고 장안에 가서 머물며 낮은 아전 자리를 구했지만 인연이 없어 호적에 등록만 해놓았다. 무공(武功)은 부풍(扶風) 서쪽 언저리의 작은 고을이다. 골짜기 입구가 서쪽 잔도 가까운 산이다. 임안은 무공은 작은 고을이라 호족이 없으니 두각을 나타내기 쉬우리라 생각했다. 임안은 이곳에 머물며 남을 대신해 구도(求盜, 진나라 시절 亭長에게 속한 아전)와 정부(亭父, 한나라 적 정장에게 속한 아전)를 하였다가 뒤에 정장(亭長, 지금의 촌장)이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냥을 나갈 때마다 임안이 노루와 꿩과 토끼 등을 나이에 따라 배분하는데 매우 쉽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며 말했다. “걱정 말게, 임소경이 고르게 분배하는 지혜가 있다네.” 이튿날 다시 모였는데, 모인 이가 수백 명이었다. 임소경이 말했다. “아무개 아들 갑이는 어째 안 왔나요?” 사람들이 그 총명함에 깜짝 놀랐다. 그 뒤로 삼로(三老, 교화 담담의 지방 관리)에 제수되었다가, 친민(親民)으로 천거되었다. 지위가 높아져 삼백석 봉록을 받는 현령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렸다. 천자가 행차하였을 때 공장을 갖추지 못한 죄로 파면되었다. 이어 장군 위청(衛靑)의 사인(舍人, 귀족 집안의 문객)이 되어 전인(田仁)과 만났다. 똑같은 사인으로 남의 문객 처지인지라 마음이 잘 맞아 서로 아껴주었다. 이 두 사람은 집이 가난하여 장군 집 가감(家監)의 환심을 사는데 쓸 돈이 없었다. 가감은 사람을 무는 사나운 말을 기르게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누웠는데, 전인이 속삭였다. “가감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임안이 말했다. “장군이 사람을 몰라보는데 가감이야 뭐!” 위장군이 이 두 사람을 데리고 평양공주 집을 찾아갔다. 공주의 집에서는 두 사람을 말몰이꾼과 같은 자리에서 먹게 했는데, 두 사람은 칼을 빼어 자리를 잘라 따로 앉았다. 공주의 집에서 모두 괘씸하게 여겼지만 감히 야단치지는 못했다.
그 뒤에 위장군의 사인 중에서 가려 뽑아 시종무관을 삼는다는 조서가 내렸다. 장군은 사인 중에서 넉넉한 자들을 가려 마구와 복장과 옥 장식 검을 갖춰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마침 현대부 소부 조우(趙禹)가 위장군 집에 들렀다. 위장군은 추천 대상 사인을 불러 조우에게 보였다. 조우가 차례로 질문을 했는데 열 중 업무 처리 능력이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조우가 말했다. “장수의 문하에는 장수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옛말에, 그 임금을 잘 모르겠거든 부리는 자를 살피고, 그 자식을 알 수 없다면 사귀는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이제 조서가 내려 장군의 사인들을 천거함은, 이로써 장군이 능히 현자와 문무의 선비들을 얻었는가를 살피려 하심이지요. 그런데 그저 저런 인형에 비단옷 입혀놓은 듯한 부자 집 자식들이나 올리시니 장차 어쩌려고 그러오?” 조우는 위장군 사인 100인을 모두 불러 차례차례 질문을 해보고는 전인(田仁)과 임안(任安)을 뽑고는 말했다. “이 두 사람 말고는 쓸 만한 자가 없군.” 위장군은 두 사람이 가난한 게 내심 불만스러웠다.
조우가 가자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각자 안장과 새 강의(絳衣)를 갖추어라.” 두 사람이 대답했다. “집이 빈한하여 갖출 수가 없습니다.” 장군이 화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집이 본디 가난한 걸, 어째서 그걸 입 밖에 꺼내느냐? 마치 내게 은덕을 베푼 듯한 그 불만스러운 표정은 무엇이냐?” 위장군은 할 수 없이 명단에 올려 보고했다. 위장군의 사인을 불러 본다는 조서가 내렸다. 두 사람이 나아가 뵙자, 천자는 두 사람이 대략 서로를 평가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전인이 대답했다. “북채를 들고 군문에 서면, 사대부로 하여금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제가 도저히 임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임안이 대답했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 시비를 정하고, 관리를 잘 뽑아 백성들 마음에 원망이 없게 하는 능력은 제가 전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임안에게는 북군을 감독하게 했고, 전인으로 하여금 황하 가에서 변방에 보낼 곡식을 돌보게 했다. 두 사람은 천하에 이름을 세웠다.
그 뒤에 임안을 익주자사(益州刺史, 익주는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 전인을 승상장사(丞相長史, 승상에게 속한 최고 관리)에 임명했다. 전인이 글을 올렸다. “천하 여러 고을의 태수들이 간사하게 이익을 얻고 있는데, 삼하(三河, 河東과 河南과 河內 지역) 지역이 더욱 심하니 신은 먼저 이 지역의 실정을 감사하고자 합니다. 삼하는 모두 궁중의 중귀인(中貴人)에게 의지하거나 삼공(三公)에 가까운 붙이가 있어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으니, 먼저 삼하를 바로잡아 천하의 간리(奸吏)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때 하남과 하내(河內, 고대 황하 북쪽 지역, 전국시대에는 魏나라 영토, 焦作市 일대)의 태수는 모두 어사대부 두부(杜父)의 형제 자식들이었고, 하동태수(河東太守, 河東은 지금의 산서성 運城市, 臨汾市 일대)는 승상 석경(石慶)의 자손이었다. 이때 석씨 집안의 9인이 이천석 봉록의 관리여서 가세가 한참 성대하고 존귀했다. 전인이 몇 차례 글을 올려 보고하자, 두 대부와 석씨는 사람을 보내 전소경에게 사죄하였다. “감히 말씀드릴 것이 아니나, 바라건대 소경께서는 없는 말로 욕보이지는 말아주십시오.” 전인이 삼하를 감사하자, 삼하의 태수들을 모두 옥리에게 맡겨져 처형되었다. 전인이 돌아와 보고하자, 무제는 기뻐하였다. 전인이야말로 강폭한 권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여겨 승상의 사직(司直, 도성 모든 관리의 감찰 책임자)으로 임명하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그 뒤에 태자가 군사를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상은 몸소 군사를 이끌며 사직으로 성문을 맡게 했다. 사직의 생각에, 태자와 천자는 부자간이니 너무 박절함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제릉(諸陵)을 지나가게 했다. 이때 무제는 감천(甘泉, 延安市 남쪽 50km 지점 甘泉縣)에 있었는데, 어사대부 포군(暴君)을 보내 태자를 놓아준 일로 문책했다. 승상이 대답했다. “사직으로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태자에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글을 올려 보고하고 사직을 체포할 것을 청했다. 사직은 형리에게 맡겨져 처형되었다.
이때 임안은 북군사자로 군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태자가 북군의 남문 밖에 수레를 세우고는, 임안을 불러 부절을 주며 군사 출동을 명령했다. 임안은 엎드려 부절을 받고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무제가 듣고는 임안에게 이중의 마음이 있어 귀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임안이 북군의 전관 소리를 매질한 적이 있는데, 그가 글을 올려 아뢰었다. “태자의 부절을 받고는 정예병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보고가 이르자 무제가 말했다. “늙어 교활한 벼슬아치로다. 군사가 일어나자 앉아서 성패를 살펴, 승자에게 붙으려 하였으니 두 마음이 있는 것이다. 임안이 죽을 죄를 여러 번 지었어도 내가 늘 살려주었는데, 이제 거짓 불충한 마음을 품었구나.” 임안을 형리에 맡게 처형하게 하였다.
무릇 달은 차면 기울고, 세상은 가득 차면 줄어듦이 천지의 변치 않는 법칙이다. 나아갈 줄만 알되 물러날 줄 모르고, 오래도록 부귀에 머물면 화가 쌓여 동티가 난다. 그러므로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니,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만세토록 기억되는 것에 어찌 미칠 수 있으랴! 뒤에 올 사람들은 삼가 경계하라.
任安, 滎陽人也. 少孤貧困, 爲人將車之長安, 留, 求事爲小吏, 未有因緣也, 因占著名數. 武功, 扶風西界小邑也, 谷口蜀棧道近山. 安以爲武功小邑, 無豪, 易高也, 安留, 代人爲求盜、亭父. 後爲亭長. 邑中人民俱出獵, 任安常爲人分麋鹿雉兔, 部署老小當壯劇易處, 眾人皆喜, 曰:"無傷也, 任少卿分別平, 有智略." 明日複合會, 會者數百人. 任少卿曰:"某子甲何爲不來乎?" 諸人皆怪其見之疾也. 其後除爲三老, 舉爲親民?, 出爲三百石長, 治民. 坐上行出遊共帳不辦, 斥免.
乃爲衛將軍舍人, 與田仁會, 俱爲舍人, 居門下, 同心相愛. 此二人家貧, 無錢用以事將軍家監, 家監使養惡齧馬. 兩人同床臥, 仁竊言曰:"不知人哉家監也!" 任安曰:"將軍尚不知人, 何乃家監也!" 衛將軍從此兩人過平陽主, 主家令兩人與騎奴同席而食, 此二子拔刀列斷席別坐. 主家皆怪而惡之, 莫敢呵.
其後有詔募擇衛將軍舍人以爲郎, 將軍取舍人中富給者, 令具鞍馬、絳衣、玉具劍, 欲入奏之. 會賢大夫少府趙禹來過衛將軍, 將軍呼所舉舍人以示趙禹. 趙禹以次問之, 十餘人無一人習事有智略者. 趙禹曰:"吾聞之, 將門之下必有將類. 傳曰:‘不知其君視其所使, 不知其子視其所友’. 今有詔舉將軍舍人者, 欲以觀將軍而能得賢者文武之士也. 今徒取富人子上之, 又無智略, 如木偶人衣之綺繡耳, 將奈之何?" 於是趙禹悉召衛將軍舍人百餘人, 以次問之, 得田仁、任安, 曰:"獨此兩人可耳, 餘無可用者." 衛將軍見此兩人貧, 意不平.
趙禹去, 謂兩人曰:"各自具鞍馬新絳衣." 兩人對曰:"家貧無用具也." 將軍怒曰:"今兩君家自爲貧, 何爲出此言? 鞅鞅如有移德於我者, 何也?" 將軍不得已, 上籍以聞. 有詔召見衛將軍舍人, 此二人前見, 詔問能略相推第也). 田仁對曰:"提桴鼓立軍門, 使士大夫樂死戰鬥, 仁不及任安. " 任安對曰:"夫決嫌疑, 定是非, 辯治官, 使百姓無怨心, 安不及仁也." 武帝大笑曰:"善." 使任安護北軍, 使田仁護邊田穀於河上. 此兩人立名天下.
其後用任安爲益州刺史, 以田仁爲丞相長史. 田仁上書言:"天下郡太守多爲奸利, 三河尤甚, 臣請先刺舉三河. 三河皆內貴人, 與三公有親屬, 無所畏憚, 宜先正三河以警天下奸吏." 是時河南、河內太守皆禦史大夫杜父兄子弟也, 河東太守石丞相子孫也. 是時石氏九人爲二千石, 方盛貴. 田仁數上書言之. 杜大夫及石氏使人謝, 謂田少卿曰:"吾非敢有語言也, 願少卿無相誣汙也." 仁已刺三河, 三河太守皆下吏誅死. 仁還奏事, 武帝說, 以仁爲能不畏強禦, 拜仁爲丞相司直, 威振天下.
其後逢太子有兵事, 丞相自將兵, 使司直主城門. 司直以爲太子骨肉之親, 父子之間不甚欲近, 去之諸陵, 過. 是時武帝在甘泉, 使禦史大夫暴君下責丞相"何爲縱太子" , 丞相對言"使司直部守城門而開太子" . 上書以聞, 請捕系司直. 司直下吏, 誅死.
是時任安爲北軍使者護軍, 太子立車北軍南門外, 召任安, 與節令發兵. 安拜受節, 入, 閉門不出. 武帝聞之, 以爲任安爲詳邪, 不傅事, 何也? 任安笞辱北軍錢官小吏, 小吏上書言之, 以爲受太子節, 言"幸與我其鮮好者." 書上聞, 武帝曰:"是老吏也, 見兵事起, 欲坐觀成敗, 見勝者欲合從之, 有兩心. 安有當死之罪甚眾, 吾常活之, 今懷詐, 有不忠之心." 下安吏, 誅死.
夫月滿則虧, 物盛則衰, 天地之常也. 知進而不知退, 久乘富貴, 禍積爲祟. 故范蠡之去越, 辭不受官位, 名傳後世, 萬歲不忘, 豈可及哉!後進者慎戒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