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하객
2017. 1. 13. 11:45
絶望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는 것은 자기 동일성,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자기 뜻과 무관하게 정해진, 또는 자기에게 강요된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동일성의 균열을, 일체성의 분리를 두려워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남에게 강제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사람도 세상도 외양만 바뀔 뿐 변하지 않는다. 올림머리가 올림머리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담마진이 담마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법꾸라지가 법꾸라지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病憂가 병우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가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이 바람은 우리를 이 들끓는 더위에서 구해줄까, 기대를 해본다. 하지만 돌아보니 재벌은 재벌을 반성하지 않고, 검찰은 검찰을 반성하지 않고, 기독교는 기독교를 반성하지 않고, 조중동은 조중동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름장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구할 것처럼 혹세무민한다. 그래서 또 절망하는 것이다.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다.
김수영은 절망했지. 1921년에 태어나 식민지에서 25년을 살았다. 해방공간에서 5년을 살았는데, 나라는 분단되었고 제주에선 4.3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삶의 터전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의 독재가 이어졌다. 4.19가 일어나 희망을 품었더니 곧바로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해방을 맞은 것, 4.19는 모두 구원의 바람이었다. 아, 우리 삶도 이제 좋아지는구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의 삶은 좀처럼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으로 점철된 삶, 역사에 대한 고백이다.
내게 강요된 정체성으로부터 이탈하여, 그것을 돌아보자. 그것이 반성이다. 희망이란 반성에서 나오고, 반성은 거리에서 가능하며, 거리는 자기 이탈로부터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