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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의 개념

검하객 2017. 4. 24. 00:11


중국사 초기 유협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陳廣宏, 關于中國早期歷史上游俠身份的重新檢討, 中國語文學誌, 2004

 

 

1. 문제제기

 

晩淸 시기 유신파 激進 분자, 자산계급 혁명당원 협의 원류와 정신은 사회 정치 개혁과 관련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1980년대 문화적 분위기와 무협소설 열기에 따라 俠文化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유협의 사회 신분

 

中國之俠(The Chinese Knight errant)(劉若愚, 1967)에 그 이전까지의 견해들 소개. 馮友蘭(36)勞千(60년대)은 평민 기원의 직업이었다, 陶希聖(30)楊聯升(57)은 모두 평민 출신은 아니며 몰락한 무사 출신도 있었다, 增淵龍夫(52)와 유약우는 유협은 특수한 사회집단이 아니라 협객 기질을 지닌 무리였다고 주장했다. 60년대 대륙에서는, 계급 분석의 기조 위에서 유협의 계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곤궁한 피압박 하층 / 통치 계급에 속하는 상층) 80년대에 들어, 관련 논저는 예외 없이 초기 유협의 사회 구성에 대한 것을 첫머리에 다루었다.

 

3,40년대 유협을 평민이나 몰락 무사로 보는 관점은, 유협의 이미지를 流民 · 武士 · 門客으로 만들었다. 이 견해는 여러 의혹 속에서도 꾸준하게 답습되어 왔다. 주요 근거는 俠以武犯禁”, “犯禁者誅, 而群俠以私劍養” (한비자, 五蠹) ‘帶劍者5의 하나로 보는 한비의 논법 私劍, 즉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는 이들이 유협으로 간주됨. 하지만 이들은 사기, 유협열전, 한서, 유협전에 나오는 신릉군 · 평원군 등 王公의 권세를 등에 업은 유협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私劍은 유협인가 아닌가? 왜 사마천은 游俠刺客을 따로 입전했는가?

 

2. 游俠私劍이 아니다

 

錢穆1942년 논문 釋俠에서 私劍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했음. (유약우는 이 성과를 놓침) 任俠에서 의 의미도 분석. “, 保也.”(說文) 任俠은 망명자를 숨겨주는 사람이었다. 유협의 신분은 賓客을 양성하고 私劍을 받아들이며 망명자를 숨겨주는, 상당한 권력을 지닌 私門의 주인이다. (卿相之俠이 아니라도, 문헌에 기록된 朱家郭解는 그만한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여러 조건의 차이에도 廣招賓客은 공통점이다. 班固유협전陳豨, 吳王 劉濞, 淮南王 劉安, 魏其武安侯 등을 포함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從車千乘, 招賓客以千數 등이다 유협은 결코 私劍이나 門客, 食客, 자객일 수 없다. 사마천이 유협과 자객을 별도로 입전한 이유이다.

 

從游俠到武俠 - 中國俠文化的歷史考察(章培恒, 1994). 유협의 시원과 의의와 연변에 대한 고찰 초기 유협은 빈객과 널리 사귀고, 개인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다. 이로 말미암아 광범위한 사회 영향력과 광대한 역량을 지닌 사람이 된다. 私劍과는 명료하게 구분된다. 이 의견은 錢穆의 그것과 일치하면서, 유협을 분명하게 정의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 한비자, 五蠹에 보이는) 私劍私門이니 俠客이 아니다. (八奸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私劍私門에서 모은 帶劍之客이며 必死之士’, 殺手이다. ‘群俠以私劍養群俠을 군주에게 고용된 私門殺手로 본 것은 전적으로 오류이다. 한비가 말한 유협과 사검은 신분부터가 다르다. 유협은 私門, 私劍은 피고용자이다. ‘俠以武犯禁, 유협이 사검을 고용해서 법을 위반했음을 의미한다.

 

3. 유협은 일종의 호족[豪强]이었다

 

60년대 유협의 신분 관련 논의들 중에는, 朱家劇猛郭解 布衣之俠의 경제상황이나 활동을 고려하여, 유협은 피압박 곤궁한 하층민이 아니라 지역의 豪强大家, 즉 통치계급의 상층인물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지만, 재산의 많고 적음만으로 유협의 지위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들의 재산은 作奸剽攻, 鑄錢掘塚등의 불법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대 학자들은 종종 游俠· 賢豪 · 豪俠 · 豪傑 · 豪俊 · 豪猾 등으로 일컬었다. 의 의미는, “德千人者謂之豪”(鶡冠者), “智過萬人者謂之英, 千人者謂之俊, 百人者謂之豪, 十人者謂之傑.” “行足以儀表, 知足以決嫌疑, 廉足以分財, 信可使守約, 作事可法, 出言可道者, 人之豪也.” (회남자) 才智와 덕행이 출중하여 威信이 있는 사람. 相成相輔의 관계. 유협이 로 일컬어지고 豪强이 된 것은, 그들이 修行砥名의 수단으로 廣結賓客하고, 자기 교유 범주 안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사회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공권력 밖의 권위를 지니게 된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 아래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立氣齊, 作威福, 結私交, 以立强於世者, 謂之游俠. (史記集解)

士窮窘而得委命, 此豈非人之所謂賢豪間者耶! (유협열전)

 

이는 한대 유협만의 특징, 또는 그 시대 학자들만의 인식인가? 저명한 우두머리를 핵심으로 삼는 사회집단의 행동방식이라는 점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했던 전국시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西漢 시대에는 豪强과 유협의 교류가 긴밀하여, 유협이 점차 豪强化 되어갔다. (劉修明·喬宗傳, 秦漢游俠的形成與演變1985) * 한비자八奸이나 飾邪의 기록으로 보면, 유협은 본래 일종의 豪强이었다. (“爲人臣者, 聚帶劍之客, 養必死之士, 以彰其威, 明爲己者必利, 不爲己者必死, 以恐其群臣百姓而行其私, 此之謂威強.”)

 

전국시대 정치상황의 변화, 제왕 중심의 정치 질서가 아닌 그 맞은편의 私門에 의탁하는 풍조가 생겼는데, 이 사문이 바로 유협이다. “棄官寵交謂之有俠.”, “有俠者官職曠也.” (한비자, 八說) 한대 전기 제왕 중심 정치체제의 미완, 유협은 천자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以匹夫之細, 竊殺生之權.” - 한서, 유협전 / “令行私庭, 權移匹庶.” - 후한서, 黨錮列傳) 이들은 민중의 비빌 언덕이 되는 동시에 군주의 권력에 대한 견제가 되었다. 그들은 절륜의 무예나 강렬한 개성을 갖춘 것이 아니라, 군주의 덕을 갖추고 군주와 를 나눈 개인 권력이었다.

 

今人都不識俠, 俠從人從夾, 爲可以夾持人也. 如千萬人在危急之中, 得此一人卽安, 失此一人卽危. 人人可以凭藉之, 方謂之俠. 今人不識俠, 轉以擊劍報仇爲俠, 則可笑甚矣. (袁中道, 李溫陵外記)

 

유협은 사회의 인심에 대해 상당히 큰 號召力凝聚力을 지닌 존재였다. 유협은 타인을 복종시키는 위세를 지닌 존재였다. 사회 중심의 主使 지위에 있었다. * “, 俜也.” “, 使也.” “使, 令也.” (說文) “令者, 發號也.” (段注) 유협은 교유권 속의 사람들에게 發號施令할 수 있는 지위를 지닌 자였던 것이다.

 

4. 餘論 : 유협에서 무협으로

 

주객 관계에 해당되는 游俠私劍의 혼동은 한나라 때부터 그 유래가 멀다. 그들은 공동이익을 추구하였으며, 밖에서 볼 때는 하나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르는 자와 길러지는 자, 숨겨주는 자와 숨겨진 자 사이의 경계가 없어져갔다.

 

유협은 문학에서 차츰 무협으로 변화해갔다. 당나라 傳奇에서는 劍俠의 형상이 두드러진다. “聚養賓客, 納召亡命仗劍行俠위진남북조 시기, 유협의 형상은 뛰어난 용력을 지닌 私劍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魏略, 勇俠傳) 이 시기 문학작품에는 俠客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西京賦博陵王宮俠曲)

 

유협이 門客, 刺客, 食客이 아닌데 어떻게 俠客이란 명칭이 생길 수 있었을까? 위진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俠客俠之客으로 이해해야 한다.

 

唐 傳奇에 대한 재검토. 陳平遠(千古文人俠客夢의 문제제기. “報恩行俠하는 협객의 형사은 당대 소설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紅線崑崙奴는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 聶隱娘古押衙는 지기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이는 고대 협의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보은은 자객 형가와 섭정의 일이지 유협과는 관련이 없다.” 이들을 豪俠小說이라 함은 실상과 맞지 않는다. 협객소설이라 해야 마땅하다. 뒷사람들은 사마천이 고심 끝에 유협과 자객을 따로 입전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두 용어를 뒤섞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