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강물에 젖지 않을 수 있을까
논문 두 편을 읽었다. 한 편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소개된 '殺王 風俗'에 내재된 심리 현상을 다룬 논문이다. 프로이트와 융과 클라인(자아심리학)의 분석을 차례로 소개했다. 프로이트는 주술을 관념연상이 사고를 지배하는 상태, 관념적 결합관계를 실제적 결합관계로 착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프레이저가 제시한 인류의 정신 단계 ‘정령론’(애니미즘) 시대 → 종교 시대 → 과학 시대를, 개인 정신의 발달 단계인 ‘자기애 단계 → 동성 부모를 이상화하는 동성애 단계 → 외부 세계를 향해 대상리비도를 집중하는 단계’에 대응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주술적 사고에 담긴 ‘사유의 전능’ 특성은 현대의 신경증자, 특히 강박신경증자의 사고 특성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간단한 유추를 거쳐 -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 프로이트는 고대의 살왕 풍속을, '부친 살해 - 공포와 죄의식 - 숭배'의 메커니즘을 지닌 아버지 살해 심리와 관련된 것으로 풀었다. 그의 논리는 언제나 명료하다. 그래서 계속 의심하게 되며, 부정하고 싶어진다. 융과 클라인 또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프로이트 관련 부분을 읽다가 다른 부분을 읽으려 하면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시하달까! 다른 한 편의 논문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아버지 살해'에 관한 논문이다. 연구자는 프로이트와 크리스테바의 분석을 대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프로이트 부분 까지만 읽히고, 크리스테바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들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등급이 같은 학자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연구자들은 끝없이 프로이트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지적하면서도 또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곤 한다. 그들 사유의 출발점이 바로 프로이트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강물을 건너지 않고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