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梁生의 실존

검하객 2018. 1. 28. 02:57

 

  남원 땅의 양생은 조실부모하여 배필도 찾지 못한 채, 만복사 동쪽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집 밖에 는 배나무가 있는데 그것 또한  그루였다. 사는 곳이 절 밖인지 안인지는 텍스트 문면에 드러나있지 않지만, 그의 생활이 이 절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절은  또 다 무너진[頹落] 절이다. 재일교포 소설가 유미리는 자기 문학의 근원을 'ない(없음)'이라고 했다. 남들은 다 가진 가족, 국적, 교육, 친구 등을 갖지 못했으며, 이 부재와 결핍에서 자기 문학이 나왔다는 것이다. 양생의 삶도 부재와 결핍 위에 떠있다. 노자가 말한 '有生於無'의 그 '無'이기도 하다. 

  봄철 달 밝은 밤이면 양생은 배나무 아래를 서성거리며 시를 읊조렸다. 양생이 읊조린 시란 유행가나 민요가 아니라, 정제된 한시이다. 어디에도 양생이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는 언급이나 암시는 없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고전소설에 흔히 보이는 허술한 점인데, 작가와 작품내 자아(인물)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작가는 자신을 인물에 투영하고, 인물로 자아를 드러낸다. "금오신화"에서 이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서정적 표지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결함이나 약점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 기법이 미적 가치의 전부는 아니며, 기교가 없어 大巧가 되는 역설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각설, 양생의 시 두 수를 간략하게 감상해보자. .

 

한 그루 배꽃나무 적막함 짝 삼으니     一樹梨花伴寂廖

가엾어라 헛되이도 달밤을 저버리네    可憐辜負月明宵

쓸쓸한 창문 아래 청년 홀로 누웠거니  靑年獨臥孤窓畔

옥인은 어드메서 봉황 피리 부시는가   何處玉人吹鳳簫

 

분위기는 靜이다. 옥인의 피리 소리 외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배나무와 적료의 관계는 청년과 고창의 그것과 대응된다. 나무는 한[一] 그루이고, 청년은 혼자[獨]이다. 이 상태가 개선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희망을 품어 있다면 하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이다. 그렇다고 약속된 것은 아니니, 그저 막연한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비취새는 어인 까닭 혼자서 날아가나   翡翠孤飛不作雙

원앙도 짝을 잃고 갠 강서 물질 하네    鴛鴦失侶浴晴江

뉘 집선 기약 있어 바둑돌을 두는가     誰家有敲碁子

하릴없이 불꽃 보며 앞날을 점치누나   燈花愁倚窓.

 

분위기는  일변하여 動이다. 비취새는 날아가고, 원앙은 물질하고, 누군가는 바둑돌을 놓고, 나는 불꽃을 보며 점을 친다. 이것으로만 보면 두 수는 靜과 動의 조합이다. 그럼에도 비취새와 원앙은 모두 혼자라는 점에서, 배나무 한 그루와 같은 같은 작용을 한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셈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비취새와 원앙이 날거나 물질할 까닭이 없고, 설사 그런다 해도 보일 턱이 없다. 과학과 논리의 잣대를 들이대면 두 구절은 거짓이다. 하지만 이는 외부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니, 시에서는 이를 틀리다고 하지 않는다. 옛 시학에서는 이런 기법을 '興'이라고 했다.  

  3,4구는 전거를 확인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3구는 북송 시기 趙師秀(1170~1219)約客. “黃梅時節家家雨, 青草池塘處處蛙. 有約不來過夜半, 閑敲棋子落燈花.”에서 가져왔다. 오기로 한 손님은 오지 않고 밤은 깊어가니,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혼자 바둑돌을 놓는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 할 글자는 '約'이다.  그래도 그에겐 '기약'이 있다. '夜卜燈花'는 등의 불꽃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는 뜻이다. 사례가 많은데 하나만 들면, 夜夜卜燈花, 幾時郎到家.”(許玠, 1228~1230, 菩薩蠻」) 그것은 극단의 무지와 무력의 상태에서 일시 불안을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겐 어떤 기약도 없기 때문이다.

   양생은 결핍과 부재의 벌판 위에 맨몸으로 놓여있다. 바다에 빠져 간절하게 구조를 바랐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 절망에 빠졌던 장발장의 꿈처렴, 운명과 세상은 그에게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양생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하나이다, 누군가의 '약속, 기약'. 하지만 양생은 끝내 '약속'을 얻지 못햇다. 존재론으로 본다면 우리 삶 또한 모두 그러하다. 하여 불안하고 허망한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절대자에게 약속을 기구하고, 또 그의 사도로부터 약속을 받아내고는, 그것을 축복, 구원, 행복이라고 말한다. 세간의 그런 사람들보다는 양생의 삶이 훨씬 실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