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어부 2
<어부> 다음에는 <入揷石堧贈人>이 편차되어 있다. 堧은 바닷가를, 揷石은 바위를 꽂았다는 뜻이다. 자연 절벽이 있는 대동강 하구의 지명일까? 하지만 대체로 서해쪽 강구는 완만한 뻘이다. 아니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조성한 인공 시설을 가리키는 것인가? 다른 사례가 없으니 확정하기 어렵다. 내용을 보면, 물살이 세며, 쌀 생산이 많은 풍요로운 지역이다. 여기 사는 사람 - 즉 贈人의 '인' - 의 생활도 여유롭고 풍족해 보인다. 도대체 김시습은 어디를 갔던 것일까?
入揷石堧贈人
君不見平壤城西滄海潯
浦口揷石如削簪 모습
巨潨鳴瀧入海濤
恰似環佩笙鏞音 소리
又不見海堧沃野菰蒲鄕
春苗芃芃秋稻香
八月九月稻熟時
浙玉炊雲翻匙嘗
家家社甕玉蛆甜 玉蛆, 동동주에 뜨는 밥알
小槽珠落聲琳琅 小槽, 古时制酒器中的一个部件, 酒由此缓缓流出. 또는 酿酒
醉來持竿喚不起
煙波釣徒玄眞子 玄眞子, 張志和의 호
浩歌一聲刺船去
兩岸茫茫天浸水
水寒夜冷魚不餌
載月滿艇回岸艤
喜君卜居遠紛庬
世間寵祿徒爾爾
제 12구의 玄眞子는 20구 <漁父歌>를 지은 張志和의 호이다. 앞의 <어부>가 20구로 이루어진 것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밑줄 친 15,6구는 역시 당나라 승려 船子和尙의 게, "千尺絲綸直下垂, 一波才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에서 가져온 것이다. 월산대군(1454~1488)의 시조,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대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도 이 게를 변주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시습이 이 시를 지은 해가 1468년이니, 월산대군이 15살 때이다. 이것도 당시의 어떤 문학 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