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미리 석불 (이경화의 논의)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병립상의 조성시기와 배경 - 성화 7년 조성설을 제기하며
이경화, 불교미술사학 3, 불교미술사학회, 2005
용미리 석불의 조성 시기를 두 방향에서 입증하고, 경위를 추정했다. 잘 쓴 논문 한 편은 아주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나는 양식.
편의상 쌍불을 蓮花像과 合掌像으로 일컬었다. 蓮花像의 보개는 관모형으로, 圓頂帽에 가깝다. 원정모는 원나라 황제와 귀족의 복식이다. 원 간섭기 이후 고위 관료와 승려들이 착용했다. 여말선초에 유행했으나, 이후 이를 전용한 승려의 신분이 하락하면서 점차 격하되었다. 이조년과 그의 아들 李褒의 초상화는 원정모를 착용한 고위 관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조년이 쓴 원정모는 정상부분 보주 장식이나 챙의 윗면이 둥글게 경사진 형태 등 용미리 불상 연화상의 보개와 흡사하다. 챙이 둥글고 정상부가 봉긋한 모자가 일반적이지만 고위신분이 착용한 유일한 시기가 원정모가 사용된 고려말 조선초기라는 점에서 용미리 불상 조성시기의 상한선이 고려말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合掌像의 경우, 1390,1년 이성계가 미륵의 제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금강산에 안치한 사리구 (1932년 금강산 월출봉 석함에서 발견)의 열두 외면에 합장한 미륵불상가의 유사성, 그리고 발원자 사기장 沈龍이 용미리 불상의 대시주 심장기의 증조부와 이름이 같다는 점을 주목했다. 합장 양식의 동일성은 가능성 정도.
하나는 기록. 세 개의 銘文.
[銘文 1] 成化七年七月 發願文 願此同類見佛土不向三(世)三有閣 直入西方九品中自他一時成正覺 又願彌勒龍華之中類在初會作上(之) 正法 貞敬夫人李氏 一人有慶 大妃無憂 大比丘尼道明 大施主咸陽君 化主惠心 泰仁郡夫人李氏 梁氏 大施主上護軍沈長己 金氏 通津安氏 潘南朴氏 前中興寺主持大師 △△僅雲△惠大師 副正柳安 旌善韓氏 上護軍李孝志兩主 司直鄭仏仲兩主 忠贊衛金仲山兩主 司直許繼智兩主 李氏崔智 正兵金德守兩主 △△韓仁重兩主 [명문 2, 연화상 하단] 當來彌勒如來大聖 世祖大王往生淨土 [명문 3, 불신] 主上殿下壽△△
1471년(성종 2), 세조 비 貞熹王后(1418~1483)의 수렴청정 기간이다. 정희왕후는 파평 윤번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두었는데, 1457년 의경세자 요절하고 1468년 예종이 즉위했다. 하지만 예종도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의경세자의 아들 질산군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정희왕ㅎ는 7년 동안 성종을 섭정했다. 명문에서 ‘一人’은 성종, ‘大妃’는 정희왕후를 가리킨다, 정경부인은 한명회의 셋째 부인 전주 이씨. 함양군(1416~1474)은 양녕대군의 둘째아들. 沈長己는 세종 비이자 세조의 친모인 소헌왕후의 아우, 세조의 외숙으로 파주의 토호였다.
용미리 석부은 정희왕후가 남편과 두 아들의 명복을 빌고, 어린 손자의 건강과 왕권 안정을 발원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명희의 영향력도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세조 사후 정희왕후와 한명희는 정치적 협력자였다. 예종과 성종은 모두 한명희의 사위였다. 하지만 왕에게 시집보낸 두 딸이 모두 일찍 죽었다. 예종 비 章順王后(1445~1461)의 공릉, 성종 비 恭惠王后(1456~1474)의 순릉이 모두 근처에 있다. (고려 선종 관련 설화와 관련된 고려초 조성설의 오류를 지적한 논의는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