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가에 앉아서
4장 못가에 앉아서
道盅(沖),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
挫其锐, 解其纷, 和其光, 同其尘.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道’는 辵과 首가 만나 이루어진 글자이다. 辵은 彳+止로, ‘가다’라는 뜻이다. 首는 머리이다. ‘길을 가거나 멈추는 행위’ + ‘머리의 작용’ = ‘道’이다. 그러니 道에는 육체의 이동 외에도 정신의 작용, 두뇌의 행보라는 의미도 들어있는 셈이다. 물리적인 ‘길’ 외에 이 글자에 매우 복잡 미묘한 뜻이 담기게 된 연유이다.
盅(충)은 ‘그릇이 비어있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뒤에 沖과 통용되었다. 그런데 沖은 본디 물결이 이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이기 때문에, 이 글자로는 본래의 취지를 파악할 수 없다. “道란 비어있는 그릇이다.” ‘盈’에서는 메모리를 떠올리는 게 좋겠다. 아무리 사용해도 가득 차지 않는 메모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니 盈은 窮이나 盡과 통한다.
연못[淵]으로 盅의 의미를 보강했다. “道란 연못이다.” 노자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채워져 있고, 잉어와 자라고 있고, 연꽃이 피고, 새와 잠자리가 찾으며, 하늘을 비춰주는 곳. 연못은 盅이면서 谷이다. 宗은 宀(집)+示(검)이다. 검이 모셔져있는 집, 신당이다. 그곳은 기원이며 중심이다. 1행이 그릇의 사유라면, 2행은 연못의 심상이다. 노자는 막사기 그릇을 보다가 연못으로 나아갔거나, 연못을 응시하다가 나무 주발을 떠올린 것이다.
구문상 3행 네 술어의 먼 주어는 道이고 가까운 주어는 淵이다. 네 개의 其 또한 연못을 지칭한다. 銳는 자기를 내세움이고, 그 의지가 강할수록 더 날은 더 날카로워지며, 이 칼끝들이 충돌하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紛] 연못은 자기를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挫锐解纷’이다. 자기를 숨겨 남들과 어울린다. 이것이 ‘和光同塵’이다.
湛은 연못에 담긴 물의 형체이자 속성이다. 노자는 연못가에서 물을 응시하고 있다. 물과 잉어와 연과 구름과 자신을 받아주는 연못을 바라보며, 자신을 조금씩 비우고 가라앉혔다. 노자와 연못이 만나는 경계에서 떠오른 것이 바로 ‘좌예해분’과 ‘화광동진’이다. 이를 우리는 詩境이라고 한다. 그 ‘투명한 비어있음’이 湛이다. 그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有無의 玄妙함이다.
이 연못은 언제부터 있었으며, 어떤 계보 속에 있는가? 상제보다 오래 되었으며, 만물처럼 음양이 만나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노자는 연못 앞에서 까마득함에 사로잡혔다. 그 사이 수면은 노을빛으로 붉어졌고 바람이 연꽃 향을 실어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