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70 노객의 낭만과 헤세의 시
28일 떠나오기 전, 잎 지는 늦가을 望京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 잠시 두서없이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득 옆에 있던 노객이 흘려버리듯 말한다. "먼 훗날 한 소녀가 날 찾거든, 멀리 떠났다고 전해주오." 노객은 이어 낭만 운운하다가 말꼬리를 흐리며 쑥스러우면서도 흡족한 표정으로 마무리했다. 노객의 표정과 시 구절이 마음에 깊이 감아들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집에 와 찾아보니 누군가가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나오는 대사란다. 더 확인해보지도 않고 영화를 구해 보았다. 독일 작가 레마르크(1898~1970)의 1954년 작품을 58년에 영화로 만든 것이다. 나치 치하이던 1944년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청년이 3주 휴가를 맞아 폐허가 된 고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복귀했는데,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기가 살려준 러시아인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으로 끝나는. 어쨌거나 천천히 여독을 풀기에는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저 노객이 흥얼거렸던 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다시 찾아보니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시로 제목은 <먼 훗날>이다. 확인해봐야겠지만, 지어진 시점은 아마도 두 차례 세계대전 무렵이겠다. 두 번의 여행으로 친숙해진, 서울 토박이 중산층을 자처하는 노객이 깊은 가을 왕징 거리에서 흥얼거렸던 시는 헤세의 <먼 훗날>이다.
먼 훗날 한 소녀가 날 찾거든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하여주오
남긴 말이 없냐고 묻거든
그저 고개만 저어주오
소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거든
나 또한 그랬다고 말하여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