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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검하객 2019. 6. 9. 08:24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John Ernest Steinbeck(1902~1968) / 전형기 옮김, 범우사, 1989

 

군 입대 전 대학 시절,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만남아있는 소설이다. 포도가 葡萄인지, 鋪道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인연이 다시 닿아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원작은 대공황의 마지막 해인 19394월에 출간되었다. 소설의 배경은 대공황 시기 미국의 오클라호마주와 캘리포니아주이다. 번역자는 전형기, 대학 시절 가끔 엇갈려 지나치던 영문과 교수이다. 1985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수중에 들어온 책은 1989년에 간행된 6판이다. 1985년은 대학 3학년, 1989년은 복학 4학년이던 해이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새 인연은 모두 옛 인연이다.

 

살인죄로 7년 형을 살다가 모범수로 가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조우드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옛날 설교사였던 케이시를 만난다. 두 사람은 조우드의 고향으로 향한다. (1~4) 그런데 그 사이 조우드의 고향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이주한다. 5장은 장면이 바뀌어 마을 사람들이 쫓겨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거듭된 흉년과 경기 불황으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토지 소유자인 은행과 기업은 이 토지를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충돌한다. 그 양상이 자못 흥미롭다.

 

만약 은행이나 금융회사인 경우, 지주들은 그것을 팔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행에서, 또는 회사에서, 사정상 필요해서, 요구해서, 주장해서, 회수하지 않을 수 없어서 등등이었다. 마치 은행이나 회사가 생각이나 감정을 가진 무슨 괴물이나 되는 존재여서 자기들에게 고약한 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래서 자기네 같은 대리인들은 은행이나 회사를 대신해서 어떤 책임을 떠맡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자기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대리인이며, 은행이나 회사는 어떤 불가항력의 기계 같은 조직체로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식이었다. 대리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힘이 센 그 괴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45)

 

아 그 놈의 괴물 같은 회사에서, 학교에서, 위에서, 나라에서. 하지만 회사나 학교나 나라가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의 짓이다. 사람들은 이 몇몇을 회사’, ‘학교’, ‘나라등으로 지칭한다.

 

농민들과 대리인들은 또 실랑이한다.

 

"할아버지가 처음에 이 땅을 갈기 시작했다. 인디언들을 죽이고 쫒아냈던 것이다.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났다. 그도 잡초와 뱀과 싸워왔다. 그러다가 어느 핸가 몹시 가물어서 아버지는 돈을 약간 빚내야 했다. 우리도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 바로 저기 저 집 안에서 우리 아이들이 다 태어나고 커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또 빚을 져야 했다. 그러다가 땅의 소유권이 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피땀 흘려 지은 농사의 일부만을 얻어먹으면서도 살아온 것이다."

 

"우리 대리인들도 그건 다 잘 아는 얘기다. 그러나 은행이 그러는 거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은행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몇 만 에이커씩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 역시 우리 보통 사람들과 같지는 않다. 그들은 다 괴물들이다."

 

"물론 그렇겠지. 허나 우리 소작인들 생각으로는 이건 바로 우리 땅이다. 우리가 이 땅을 측량하고 나누고 갈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죽어온 사람들이다. 이제 쓸데없는 불모의 땅이 되어버렸을지라도 이것은 우리 땅이다.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일생 동안 일했고, 그리고 여기서 죽어왔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대한 우리들의 소유권이다. 그것이 진짜 소유권이지 숫자 나부랭이 몇 개 적어놓은 종이쪽지가 소유권은 아니다."

 

"참 안 된 일이지만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괴물이 문제다. 은행이란 놈은 사람 같지가 않단 말이다. 은행은 말하자면 사람 이상의 어떤 존재다. 바로 괴물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면서도 인간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괴상한 물건이라니깐."

 

 →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생각과 은행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이 소설이 씌어진 지 80년이 지났는데, 나의 토지관은 아직도 농민들의 그것에 머물고 있다. 나는 200년을 살아도 부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나의 토지관이 옳다고 생각한다. 땅은 그 자체로 사랑받아야 한다. 그것은 금전가치가 아니며, 무분별한 개발의 대상도 아니다.

 

트랙터가 집 마당을 갈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땅을 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했고, 그의 발은 땅 위를 디딜 수도 없었으며 대지의 훈훈함과 무한한 힘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저 쇠의자에 앉아서 쇠폐달만 밟고 있었다. 그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대견해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거나 분발하거나 욕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아니면 힘을 더 내거나 하지도 못했다.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기를 돋을 수도 저주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땅을 아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믿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약 씨앗이 떨어졌다가 싹이 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만약 갓 나온 작물이 가뭄에 말라 죽거나 홍수나 비에 씻겨 내려가도 그것이 트랙터와 아무런 상관이 없듯, 그에게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런 정열이나 감흥도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강간하면서 톱니 장치로써 사정을 계속했다. 아무도 씨앗 하나 만져 보지 않았고 자라는 곡식을 대견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꾸지도 않은 것을 먹었고, 자기들이 먹는 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땅은 쇠붙이 밑에 깔려 고통을 견디었고 쇠붙이 밑에서 점점 죽어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도 미움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도나 저주조차도 못 받았기 때문이다.

 

 → 땅의 소유자는 땅 자신이다. 사람들은 그 땅에 잠시 머물 뿐이다. 어느 누구도 이 땅을 오염시키거나 뒤집어엎을 권한은 없다. 최소한이나마 그럴 권한은, 이 땅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져야만 한다. 아 나의 이 시대에 뒤떨어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각이여! 

 

이야기, 재밌다! 35년 전 느낀 재미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