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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덕의 낡은 객점

검하객 2019. 8. 31. 15:03

 

  성산에서 일어난 해가 하루 일을 마치고 구름 손길을 느끼며 잠자리에 드는 한림 귀덕에는, 서낭당 돌무지 같은 객점이 있다. 염분 머금은 바람이 되어 집담과 밭담 사이를 오가던 나그네가 무심코 그 앞을 지나노라면, 팽낭에 걸린 오색천이 나부끼는데, 젊은 안주인의 미소가 우주의 별빛처럼 다가온다. 먼 옛날에 예약이라도 해둔 듯 문 열고 들어서면, 주문에 앞서 미소 두어 점이 나비가 되어 날아온다. 하얀 바람벽 위 요절 화가의 자화상에 눈길을 주고, 수평선 위 점 점 점 어선의 집어등 불빛에 마음이 두근거리면, 한라산 21년 산 술잔 속에서 큰 고래가 물을 뿜는다. 주객의 경계가 사라지고, 제주 이야기가 하나 둘 펼쳐지면, 고래는 어느새 고양이가 되어 비어가는 접시 옆에서 가릉거린다. 제주 한림과 곽지 사이 바닷가에는, 그대가 예약하고 잊어버린, 밤물결 소리 속에 전생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객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