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포털 큰 화면에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란 제목이 걸렸기에 들어갔더니 조선일보이다. 이는 물에 빠진 것과 같아, 이미 들어왔으면 서둘러 나가는 건 의미가 없다. 25년 전 조선일보를 2년쯤 구독한 뒤, 이런 신문에 대한 최고의 대접은 무시와 외면이라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난 종이로 된 조선일보 기사를 읽은 적이 없다. 헌데 온라인 기사는 제목만 보고 클릭하다보면 아주 종종 이 조선일보라는 구덩이에 빠지곤 한다.
누가 뭐라지도 않고,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니지만, 불편한 마음을 눌러가며 기사를 읽었다. 역시 현란하고 화려하다. 그에게 가장 적당한 호칭은 '才士'이다. 그 안목과 솜씨로 보면, 그는 확실히 한 시대를 풍미한 재사이다. 그 재능을 인정하지만, 난 이 재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한 마음의 무게, 말을 아끼며 축적한 진보의 동력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민한 행보와 민첩한 표현에서, 때로는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이에게서 우러나는 미더움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아름답다. 난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풍부한 자본과 경험, 그리고 영향력을 무기로, 문화와 예술을 다뤄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마치 예술과 문화와 학문이 순수한 것처럼 말이다. 하여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조선일보의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는 순수한 학문이며 예술이라고 말한다. 우매하거나 교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순수한 학문과 예술을 내세워, 자신들의 부패와 사악함을 은폐하고, 나아가 포장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각설, 댓글들을 보았다. 대체로 공감과 우호의 내용들이 많다. 추천수가 가장 많으 댓글은 "조선일보 기자들도 많이 고민해봐라. 인생이....별거아냐 소신껏 살다 가면돼,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떠나는게 결국 나를 위한 일이야."이다. 이 댓글에는 118개의 재댓글이 달려 있는데, 비판적인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아름다운 기사에까지 정치 입장을 내세운 것에 대한 불편함 감정의 토로이다. 난 이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떠올리며 마음으로는 공감했지만, 표현을 참은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다 표현하고 살 수는 없다. 나의 분노와 증오가 더 큰 분노와 증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이런 댓글이 있다. "이어령이 이렇게 칭송해야할 지성인인지 나는 모르겠다. 사회를 생각한 김수영에 비하면 개인이라는 감옥에 산 사람이고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 혼자 하는 호기심'에 묻혀있는 것 같다. 아직도 유명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이다. 이렇게 사회와 이웃을 고민하지 못하는 사람을 조선일보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용해왔다. 상징세계를 돌아다니는 까닭은 실제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이어령처럼 머리로만 살면 불행하다. 손으로 사는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거다." '좋아요'를 누르고, '공감'이라고 재댓글을 달았다.
이어령은 분명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로 이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격동을 시대를 온 몸으로 건너온 그에게, 이런 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거나 책임을 추궁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를 비난할 만큼 내가 훌륭하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후세에 남을 만한 한국 당대의 인물이라면, 역사의 법정에 서야 한다. 나는 外史의 자격으로 그에 대한 포폄을 품고, 또 그를 立傳하는 일을 구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