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늦가을 봉선사 풍경
용화 마을 풍경으로 도저히 허기가 가시지 않아, 다시 예정이 없이 길을 奉先寺로 틀었다. 박제가의 정유각시집 제일 첫 자리에 놓인 시는 봉선사에서 지은 것이다.
봉선사에서 奉先寺作
꽃잎은 절집 문을 수북 덮었고 花覆寺門深
외론 안개 위로는 바람이 맑다. 風淡孤烟上
새 울어도 스님은 오지를 않고 鳥啼僧不來
먼 풍경만 이따금 혼자서 운다. 遠磬時自響
여라 덩굴 사이로 오솔길 있어 蘿際知有徑
승경 찾아 그윽히 혼자 가노라 雲泉窅獨往
박제가는 뒷날 (1797년 이후, 현감 시절, 확인) <봉선사를 들렀다. 어린 시절 글을 읽던 곳이다 歷奉先寺, 余童子時, 讀書處也>란 제목의 7언 절구 5수를 지었다. (권 4) 아래는 그중 몇몇 구절들이다.
스님 거처 숲 그늘이 새벽에 침침한데 僧寮樹影曉沈沈
등롱 들고 독경 소리 듣던 일 떠올리네 憶抱篝燈聽梵音
슬프다 세상에서 한 시대 살펴보니 惆悵寰中觀一世
푸른 산에 몇 개의 부도만 늘었구나 碧山添却數浮圖
禪房의 꽃나무는 바람에 늙어가고 禪房花木鬢絲風
사미승도 어느덧 오십의 노승일세 童子居然五十翁
그러니 앞의 시는, 15세 이전 동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두 해 하루가 멀다 하고 박제가를 만나던 시절, 봉선사에 가면 소년 박제가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려나 했는데, 열 몇 해가 지나도록 그럴 기회가 없었다. 오늘 빗속의 허기가 이곳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대개 새로 지은 대규모 건물들이라 기대했던 운치는 없었는데, 절집을 둘러싼 울 풍경은 볼 만했고, 앞 너른 뜰은 거닐기에 좋았다. 아버지 덕에 절집에 들어 글을 읽을 수는 있었으되, 엄마의 천한 신분으로 인해 이미 출세 길이 봉쇄되어 있던, 소년 박제가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읽었을까?!
처마에서는 빗물이 떨어지고, 관음보살(2017년 조성)은 누이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