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儺禮)
나례(儺禮)는 한나라 때 궁중에서 시작된, 섣달 그믐날 밤 역귀와 재액을 물리치는 행사이다. '儺'[nuó]는 원래 '절도있는 행동과 정연한 역할 분담'을 뜻하는 글자였다. 뒤에는 '역귀를 몰아낸다(내는 행위)'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아무래도 그 기원은 한나라 때의 나례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의 처용 이야기는 나례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안에서 발생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기록상 중국식 나례는 고려 초에 도입된다. 나례는 험상궂은 탈을 쓴 배우들이 큰 동작으로 박력 있는 춤을 추며, 온갖 역귀를 물리쳐 새해에 좋은 기운을 받아들이는 의례이자 놀이였다. 이후 이 놀이는 민간으로 퍼져나가 유행했다. 산대놀이가 대표적 예이다. 고려 초기 중국의 나례(儺禮) 모방은, 예종 때부터 연극 형식으로 바뀌어 산대잡극(山臺雜劇)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에 들어와 특히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이를 상연하였다. 이것이 다시 민간에 등장, 가설무대에서 하기 시작하여 평민극(平民劇)으로 변하였다. 내용은 종이나 나무로 만든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들이 풍류에 맞추어 춤과 노래와 재담 등으로 꾸민 극을 하는 것이다. 나례(儺禮), 나희(儺戱), 구나(驅儺), 산대희(山臺戱), 산붕(山棚) 등으로도 불렸다. 山臺나 山棚은 산처럼 높이 쌓은 희대(무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민간 연희 예술이 발달했는데, 연희가 펼쳐지는 장소를 瓦舍勾欄이라고 했다. 와사는 유람 관객이 그 안을 시냇물처럼 쉬지 않고 흘렀다고 하여, 모여들 때는 瓦合, 흩어질 때는 瓦解에서 가져온 말이다.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지는 것이 연희 장소의 특징이다. 큰 와사 안에는 여러 개의 주루와 다관, 기원과 점포 등의 시설이 있었다. 그중 연희 무대를 勾欄, 勾肆, 游棚, 邀棚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山臺에 대응된다. 아마 초기 궁궐에서는 중국에서처럼 무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서 연희가 펼쳐졌기 때문에 山帶라 일컬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민간에 퍼지면서, 민간의 놀이 문화에 적응하면서, 마당에서 펼쳐지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름과 실상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이다. 피부 접촉이나 호흡기를 통해 급속도로 전염되는 질병을 瘟疫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고, 거기서 여러 나희가 발생 유행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 역병에 대한 감각, 관념이 거의 사라졌는데, 신종 코로나가 그 무시무시한 힘을 환기시키고 있다. 아래는 처용탈(악학궤범)과 중국의 儺面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