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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판 주택시장(이봉수, 경향, 6.10)

검하객 2020. 6. 10. 17:22

   우리나라 주택문제가 이토록 심각해진 배경에는 주택경제학에 관한 몰이해가 깔려 있다. 주택은 우선 입지, 곧 땅에 묶여 있어 일반 상품의 수요공급 원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새 아파트는 대개 투기수요에 충당된다. 우리 주택시장은 소득과 가구원수에 맞는 집에 거주하도록 유도하는 ‘주택 여과’(housing filtering) 과정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신혼부부가 작은 집으로 출발해 소득과 아이가 늘어나면 점점 큰 집으로 이사하고, 자녀가 출가하면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게 이상적 여과 과정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소유자의 지위를 과시하는 ‘지위재’다. 외국에도 부자 동네는 있지만 대개 단독주택이어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는 84억원짜리 한남더힐을 필두로 전국 아파트 순위가 매겨진다. 거주보다 투기 목적이 커서 큰 집을 사면 작은 데로 옮겨가는 이가 거의 없다. 노인 혼자 초대형 아파트에 살면서 세금 내기는 꺼린다.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에 관해 배현진 의원은 ‘감면안’, 태영호 의원은 아예 ‘면제안’을 대표발의함으로써 본인들의 무지와 미래통합당의 수구성을 드러냈다. 더불어 민주당에서도 이인영·이낙연·김태년 등 실세들이 강남권 후보 지원유세에서 1주택자 감세안을 들먹였으니 여야 합작으로 법이 통과될 수 있다. 보수언론은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1주택자 종부세 기준 현실화, 여야정 본격 협의 나서라’고 촉구하는 등 ‘종부세 폭탄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종부세는 부부가 각각 1주택자가 될 수 있게 허용하고 세액공제도 대폭 해줘 제도의 본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지난해 12·16대책에서 또 고령자세액공제율을 올리고 장기보유공제 포함 합산공제율을 80%로 높였다. ‘똑똑한 한 채’ 전략을 쓰는 가구가 많아진 이유다. 앞으로 전 국민 고용보험이든 기본소득이든 뭔가 하려면 증세를 해야 할 판인데 부자는 감세하겠다는 건가? 이런 무지에는 무지막지한 말로 치받고 싶다. “봉급쟁이가 많이 내는 근로소득세는 1직장이면 깎아주나?” “한 직장에 오래 다니면 장기근속공제를 해주나?” “고령 노동자는 감세해주나?”

   정부가 다주택자에게 주택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큰 세제 혜택을 준 것도 투기를 장려한 조처였다. 경제 활력도 죽였다. 집 몇 채 가진 자가 벤처기업가보다 훨씬 고수익을 내는데 누가 창업하고 혁신하겠는가?

   주택시장을 교란하는 또 하나 도그마가 ‘용적률 확대’와 ‘공급 위주’ 주택난 해결책이다. 중앙일보는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에서 “서울 아파트 용적률 올려 고층 개발해 공급 확 늘려야” 한다며 두 가지를 동시 주문했다. 이 논리의 모순은 ‘용적률 확대의 정치경제’로 설명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일가족 자살자가 속출할 만큼 집값이 뛰고 주택문제가 심각해지자 분당·평촌 등 4대 신도시 건설에 착수한다. 우방·청구·건영·한보·우성 등 아파트 업체들은 “수익이 안 나서 못 짓겠다”며 “용적률을 늘려 달라”고 버틴다. 당시 건설부 출입기자이던 나는 취재 결과 더 큰 수익을 내려는 ‘담합’으로 봤으나 다급한 정부는 업계에 굴복한다.

   정치세력과 관료들은 부동산 경기부양을 위해 손쉬운 용적률 규제 완화를 몇 번이나 했다. 하늘을 보기 힘든 고밀도 아파트단지가 한국에 대거 들어선 이유다. 아파트를 부수고 증축하면 집주인과 건설업체에도 이익이 돌아가니 재건축 허가가 나도록 아파트가 빨리 낡기를 기다리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아파트 평균수명은 영국 128년, 독일 121년, 미국 72년인데, 한국은 27년이다. 어느 나라보다 잘 지은 아파트를 청년기에 때려부순다. 자원 낭비와 폐기물 양산을 불러오고 전국 대도시를 ‘영구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소득주도성장이나 기본소득 혜택도 막대한 불로소득에 견주면 ‘껌값’이다. 부동산이라는 ‘욕망의 열차’에 제동을 걸지 못하면 빈부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정책을 ‘잘하고 있다’는 국민이 24%인데 ‘잘못하고 있다’가 42%였다. 집 가진 자의 불만도 섞여 있겠지만, 집 없는 서러움과 분노는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강남3구의 ‘종부세 벨트’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는데, 종부세 완화한다고 균열이 생길까? 지지자들이 실망해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에 더 일찍 균열이 오면 어쩔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