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치의 조화, 역할의 분배 / 日落西山(이문구, 1971)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들은 철부지의 어린 눈에 잠깐 동안 스친, 인생에서 은퇴하다시피 왕조의 유민으로 은둔 자적한 노인의 조그마한 편모에 그칠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그분은 내가 살아가면서 잠시도 잊을 수 없도록, 내 심신의 통치자로서 변함이 없으리라 믿어지는 것은 무엇에 연유하는지 모르고 있다.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19, 46쪽)
-> 이상한 영향과 지속. 아주 약한 힘이 뒤에 거세게 살아나기도 하고, 강제하지 않아서 외려 더 억센 강제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 고색창연했던 가훈들은, 내가 태어나기 그 훨씬 전부터 아버지가 이미 앞장서서 깨뜨리고 어겨, 전혀 반대 방향의 풍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이 사실이었다. ---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들과 당신 사이에 금이 벌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두꺼운 장벽으로 굳어가는 것을 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이방인을 자인하며 인간사에서의 은퇴와 함께 변천하는 시대와 세월을 방고ㅘㄴ하기로 작정한 까닭이었으리라. (46,7쪽)
-> 기이한 조화와 의지. 체념, 지킬 수 있는 건 고수하고, 달라지는 건 그대로 인정한다. 그리고 자기 역할 밖의 것을,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임하고 의지한다.
아버지의 사상은 할아버지의 그것과 대각을 이뤘다 할 만큼 가문에선 파격적인 것이었다. 매사가 엇먹고 섞갈리는 상태였다. (57쪽)
아버지는 예상 밖으로 강건한 젊은 표정을 보이며, 아직도 뜨거운 찬합 보따리가 들려진 내 손목을 짐짓 잡아주며 한 첫 마디 말이, "그새 할아버지 말씀 잘 들었니?"였다. 다시 말해 그동안 애썼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한테서 차갑고 무정한 거리감, 아니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나는 그때를 지적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59쪽)
->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아버지에게 맡겼던 것이다. 늙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마음 든든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길이 파국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인훈이 보여준 뒤죽박죽의 근현대사를, 이문구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불행한 역사가 끝내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저력과 희망은 이런 이야기들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