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갈매기 (광장)

검하객 2021. 4. 17. 17:59

  『광장 (1960)의 서사를 관류하는 이미지는 갈매기다. 이명준은 알지 못할 어떤 시선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태어나지 못한 딸의 눈이었다. 은혜는 뱃속의 딸과 함께 갈매기가 되어 명준을 따라온 것이다. 명준은 사랑했던 은혜와, 한 번도 사랑을 주지 못한 딸에게로 간다.  20대의 최인훈은 매우 관념적(지적)이었고, 또한 도드라지게 서정적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 안에 가까운 역사가 담겨있고, 서정은 당대의 사회에서 펼쳐지는 서사를 품고 있다. 이명준의 절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갈매기 모녀의 사연이 애틋하다.    

 

  또 그 눈이다. 배가 떠나고부터 가끔 나타나는 허깨비다. 누군가 엿보고 있다가는, 명준이 휙 돌아보면, , 숨어버린다. 헛것인 줄 알게 되고서도 줄곧 멈추지 않는 허깨비다. 이번에는 그 눈은, 뱃간으로 들어가는 문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다가, 명준이 고개를 들자 쑥 숨어버린다. 얼굴이 없는 눈이다. (17)

 

  아침부터, 이 배를 지키는 전투기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때로는 마스트에 와 앉기도 하면서, 줄곧 따라오고 있는 갈매기 두 마리가, 그 위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왼쪽으로 비껴 날고 있다. (18)

 

  “갈매기가 따라오는군요.” (25)

  “뱃사람들은 저런 새를 죽은 뱃사람의 넋이라고들 하지. 뱃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고. 흔히 저런 수가 있는데, 한번은 영국에서 캘커타까지 따라온 적이 있어. 그 새가 없어졌을 땐 서운하더군. 대단한 정성 아닌가. 아마 메인 마스트에서 주무실 걸.” (25,6)

 

  ”딸을 낳을 거예요. 어머니가 나는 딸이 첫애기래요.“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가 다른 한 마리의 반쯤한 작은 새인 것을 알아보자, 이명준은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하고 눈이 마주쳤다. 새는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눈이었다. 뱃길 내내 숨바꼭질해온 그 얼굴 없던 눈은. 그때 어미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애를 소지 마세요? (195)

 

  제 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을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웠던 게 틀림없다. 큰일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 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간가 하면, 되돌아 오면서, 바다와 놀고 있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씨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