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이야기
아이돌 얼굴 사진이 있는 홍보용 플라스틱 부채를 보는데, 오래 전 대나무 부채가 떠올랐다. 부채에는 배추와 무 그림이 있었으니, 농협이나 농약사 등의 홍보물이었던 듯하다. 그 시절 한여름에야 선풍기만 있어도 호사였고, 대개 사람들은 부채 하나에 의지하여 더위를 떨쳐내려 안간힘 썼다. 하긴 선풍기(扇風機)도 부채바람기계 아닌가! 밤이면 모기장 안에서 부모님이 부쳐주는 바람을 살갗으로 느끼며 잠에 들곤 했다. 그 바람의 결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대나무 부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부채는 보통 대나무로 만들었다. 옛 문헌에 ‘포선(蒲扇)’이 많이 나오니 부들도 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던 모양인데, 부들 부채는 본 적이 없다. 손 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나, 버려지기 위해 만들어진 플라스틱 부채가 쓰레기처럼 놓인 모습을 보니, 왠지 옛날 대나무 부채가 그리워진다.
이규보는 부채 관련 시를 여러 수 남겼다. 누군가에게서 선물로 둥글부채 - 團扇, 圓扇이라고도 했다 - 를 받고 고마운 마음을 두 수의 시로 표현했다. 한여름에 가을을 받고, 부채는 두 손 위에 보름달이 되었다고 했으니,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시를 받았다면 부채를 보낸 사람 마음도 그지없이 좋았으리라.
사귀는 정 묽기가 물과 같고요 交情淡若水
둥근 부채 희기는 서리와 같네 團扇皎如霜
밤 아닌데 달은 늘 가득 차있고 不夜月長滿
가을 앞서 바람이 서늘하여라 先秋風自涼
그대 마음 참으로 얼음인지라 君心眞似氷
만나면 울울한 맘 씻어주었지 相對洗煩鬱
한아름 가을까지 보내주시니 更贈一襟秋
두 손 위 둥그런 달이 되었네 留爲雙手月
부채를 잃어버린 낭패감을 담은 시도 남아있다. 4구의 유공(庾公)은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다. 한때 그의 한몸에 권세가 몰렸는데, 왕도(王導)는 그것을 미워하여 서쪽 바람이 불 때면 부채로 낯을 가리고 “원규(元規 유량의 자)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힌다.” 하였다. (『晉書』 권 65, 「王導傳」) 그러고 보니 부채에는 햇빛이나 먼지, 또는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가리는 기능도 있었다. .
불더위 유월이라 삼복 철인데 炎天六月伏金辰
보름달 둥글 부채 잃어버렸네 失却團團月一輪
앞으로 무엇으로 낯을 가리랴 祇恐從今難障面
서풍에 권세 티끌 맞아야 하리 西風長被庾公塵
이규보는 특별히 둥글부채를 좋아했던지, 「단선명(團扇銘)」이란 글도 지었다.
푸른 대나무를 둥글게 지어, 하얀 비단으로 옷을 입혔네. 서늘한 바람 제 절로 오네, 손짓도 부르지도 않은 것을. 슬프다 중생들의 사바세계여, 닳고 끓기가 불가마로다. 바라건대 이 부채를 까부르고 흔들어, 맑고 깨끗하게 씻어내 불타는 그대들을 구하고 싶네! (綠筠作團, 裝以氷綃. 涼風自來, 不召不招. 哀哉三界, 煎爍如窯. 願以此扇, 是簸是搖, 濯之以淸, 救爾之焦.)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선풍기와 냉방기를 한 번에 없애버리고, 대붕의 날개만한 대나무 부채를 만들어 부쳐 무더위를 물려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