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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묘사

검하객 2021. 8. 7. 11:33

  일상의 풍경과 평화

 

  나는 한참을 거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철역 입구 쪽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한 명은 전화기에 대고 뭔가를 이야기했고 다른 한 명은 가끔 몸을 굽히며 귀 뒤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두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이내 그들의 모습이 내게 활기와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때문에 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우 흥미롭게 주시했다. 좁은 전화 부스 안에서 몸을 발로 밀어 열어둔 상태로 깔깔거리며 웃어대는가 하면 수화기를 움켜쥐고는 수다를 떨어대는 모습이라니. 틈틈이 동전을 하나씩 더 집어넣어가며 재차 저노하기 쪽으로 몸을 구부리는 그들 옆으로 지하철 역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맨홀을 통해 자욱하게 뿜어져나와 아스팔트를 넘어 주변의 골목길로까지 짙게 깔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한결 마음이 가벼줘져서 마치 파라다이스 같은 상태가 되어 나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고 또는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인식으로 연결되는 그런 상태 말이다. (38,9쪽)

 

  그의 아이러니와 나의 비극 (노래와 이야기)

 

  드디어 가수가 전자 기타를 잡고는 마이크 앞의 간이의자에 자세를 잡고 앉았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간간이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춤을 추지 않고 주위에 빙 둘러서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정신질황을 앓고 있는 어느 소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소녀는 자신이 일하던 농가의 농부한테 강간을 당한 후 아이를 갖게 되었다. 가수는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접니다!" 하더니 기타를 쳐댔다. 그 여운은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녀가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갔을 때 내가 태어났어요. 그녀는 아이를 앞치마로 둘러싼 채 집으로 데려왔죠. 나는 농부와 그 아내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울타리로 기어 올라가(원래 '나는 버지니아 울타리 위로 기어 올라갔죠' 하고 그 가수는 말했다)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제대로 말도 못하는 정신 나간 여자가 그쪽으로 달려와서는 아이가 무사히 내려오도록 도와주었죠. 그러자 농부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엄마, 저 바보 손이 엄청 부드러워!' 그 바보가 바로 내 엄마였습니다!" 가수가 소리쳤다. 그는 기타를 벗어버리고 웅크리고 앉아 진동음이 좋은 길쭉한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65,6쪽)  

페터 한트케 / 안장혁 옮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문학동네, 2019,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