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망리 (송령이골 무장대 시신 방치 터, 현의합장묘)
아래는 마을 입구에 서있는 소개 글을 간추려 옮긴 것이다.
해안마을에서 약 6km, 동쪽으론 신흥2리, 서쪽으론 한남리, 남쪽으로 의귀리와 이웃. 200여 가구 400여 명. 북쪽 경계는 궤팽이 오름과 물찻오름을 연결하는 해발 700m의 등고선. 남쪽 경계는 올리소-신흥사거리 구간. 궤팽이오름과 신흥사거리 사이는 약 12km. 대부분이 임야, 감귤 농업, 고사리 채취.
水望은 물영아리오름의 옛 이름인 물보라오름의 한자 차용 표기, 물영아리오름 앞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수망리라고 하였다. 17세기 말 탐라도에 졍의현 수망촌 처음 표기되었지만, 1443년 경 정의현 진사리(성읍리)에서 김계수가 처음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1.5만분의 1 지형도에, 전동산동, 장구동, 신비지동, 묵지동, 영아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음, 제주4·3을 겪으며 모두 폐동, 1950년 봄 전동산동(향사동)만이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토화, 사리물궤에서 17명 집단 학살. 1949년 11월 수망사거리 남쪽에 주민들 스스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 완공, 돌아온 주민은 60여 세대에 지나지 않음. 102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율이 높았음. (1954년 겨울 한라산 금족령 해제.)
물영아리오름
일렛당(무랏당, 물우리당, 일뤳당) - 수망리 유일의 당집, 팽나무 당목, 삼신선과 삼백관을 모심, 음력 6월 7일, 11월 7일 제향.
올리소 – 마을회관 남서쪽 500m
잣성 – 조선시대 국영 목장인 10소장이 설치되면서 겹돌담 형식의 돌담 축조, 말 탈출 방지용.
사리물궤 – 충혼묘 남쪽 500m, 사리물 근처
수망리 마을공동목장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 (의귀초 서북쪽), 현의합장묘 (의귀초 동쪽), 충혼묘 (군경), 이건 마을방문센터에서 만난 김정주 선생에게 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