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글쓰기, 극미론(極微論) 단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를 읽는다. 내 수준에 적합한 물리학 입문서이다. 22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연과학은 기본입자라는 극소의 세계부터 전체 우주라는 극대의 세계까지 모든 현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 시간으로 따져보면 찰나, 곧 1000조 분의 1초보다 짧은 순간부터 영원무궁, 곧 우주의 나이에 해당하는 137억 년까지 모든 현상을 다룹니다.
여기서 김성탄이 "서상기" 평어에서 펼친 極微論이 떠올랐다. 또 찾아보니 2007년 제출된 박사학위논문 "金圣叹美学思想研究"(丁利荣, 武漢大)에 極微法을 논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는 극미법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極微는 고대 인도 불고 경전에 처음 등장하며, 연기론의 인연화합 세계관 위에서 건축되었다. 극미는 범어로 Paramanu라 하며, 처음엔 鄰虛塵으로 번역되다가 뒤에 極微로 번역되었다. 더이상 분해될 수 없는 물질 단위를 의미한다. 극미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地、水、火、風을 4대 원소로 보았다. 地(堅實), 水(濕潤), 火(炎熱), 風(輕動). 極微性은 네 가지 물성을 의미한다. 極微法은 四大가 모여 물질을 구성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楞嚴經》 권 3에서 불타는 아난에게 말한다. “汝觀地性, 粗爲大地, 細爲微塵, 至鄰虛塵, 析彼極微, 色邊際相, 七分所成. 更析鄰虛, 即實空性. 阿難, 若此鄰虛, 析成虛空, 當知虛空出生色相 ….” (極微 → 鄰虛塵 → 實空性 → 虛空) 마지막의 “當知虛空出生色相”은, 極微가 만법을 구성하는 기본 질료임을 말한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極微를 實在, 有로 간주했고, 대승불교에서는 假法으로 여겼다. 대승불교의 空에는 2宗이 있는데, 모두 極微를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空宗은 緣起性空으로 입론했으니, 法性은 不生不滅이고 不常不斷으로 모두 空性에 속하니, 일체의 현상은 모두 因緣和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極微法은 불교세계관의 體現이다. “一花一世界, 一葉一如來.” “芥子納須彌.” 하나의 微塵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한 알의 모래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 사물은 모두 極微에서 일어나며, 작고 또 작게 하면 虛空에 이른다. 그러므로 만사만물은 허공 속에서 그 색상을 드러낸다. 極微法은 이러한 虛空出生色相임을 인지한 하나의 方便法門이다.
이어 김성탄이 펼친 문장론으로서 극미법을 설명한다. 김성탄의 극미론은 <酬韻>의 평어에서 펼쳐진다. 여기에 대해 2004년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분량은 많고 지면은 부족하여 번역을 하지는 않았다.
김성탄은 〈酬韻〉 앞 부분의 평어를 曼殊室利菩薩(문수보살)이 극미한 세계를 논하기 좋아하였다는 말로 시작하여, 전체 글의 대부분을 極微論에 할애하였다. 보살의 설법에 따르면, 사바세계의 크기는 무한대이지만 그 기원은 極微한 데 있다고 한다. 김성탄은 이 한 마디로 글 짓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겠다 하고, 다음 네 가지 비유를 들었다. ① 늦가을 맑은 날 비늘 같은 구름 무늬, ② 청둥오리의 배에 난 털의 빛과 모양, ③ 초목의 뿌리에서 줄기가 자라고 꽃받침에서 꽃잎이 생기는 과정, ④ 등잔 불꽃의 모양과 빛이 변해가는 과정. 이는 모두 천하에서 지극히 절묘한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의식의 풍족만을 추구하지 도무지 이런데 이런 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지극히 절묘하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맑은 가을날 구름의 비단결 같은 비늘 무늬를 두고 단순히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의 사이[有無相間]로만 본다. 하지만 땅 위에서는 그렇게 보여도, 실제 비늘 무늬 사이에는 무한한 層折이 있어 이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으니, 이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늘 무늬 사이에 얽히고설킨 무한 층절, 이것이 極微의 세계이다. 청둥오리 배에 털이 곱게 난 모양도 단순히 있고 없음의 사이로만 보아 세필에 먹물을 묻혀 하나하나 그려내면, 그 비슷하지 않음에 삼척동자도 웃을 것이다. 잔털과 잔털 사이에도 한 자 한 척의 거리가 있으니, 여기가 또한 극미의 세계이다. 초목의 꽃이 피는 과정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지만, 꽃의 입장에서는 여러 대에 걸친 수 겁의 긴 세월이니, 이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등잔의 불꽃도 淡碧→淡白→淡赤→乾紅의 순서로 빛이 변했다가 나중에는 黑煙이 되고 細沫처럼 내뿜는데, 담벽과 담백, 담백과 담적, 담적과 건홍의 사이[相際]에도 極微한 세계가 있으니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앞의 둘은 공간 뒤의 둘은 시간을 말했는데, 결국은 경험이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 시공의 단위를 끝없이 분절하고 거기서 사물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라면 큰 것만이 큰 게 아니고, 중요한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게 된다. 모든 사물은 자기 기준을 내포하고 있으며, 여기에 따르면 모두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 명제를 삶과 사회의 차원으로 끌어오면, 삶의 자잘한 일상사 모두가 중요한 문학의 대상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래서 김성탄도 “이런 마음으로 살펴 가면, 시골에서 장 담은 항아리를 보내주는 한 마디 말, 婦姑가 다투는 말, 길에서 사람이 읍하며 이별하는 모습을 묘사해도 반드시 文致가 있게 마련이다. 길가에서 사탕 부스러기 하나를 주워도 하나하나 항아리에 넣어서 그게 가득해진다면, 천하의 어떤 주제나 제목이 압박해 와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서상기》 2본 2절은 〈請宴〉편이다. 앞 절은 장군서가 기계를 내어 앵앵을 납치하러 온 도적 孫飛虎를 물리쳐 앵앵과의 혼인 허락을 받아내는 내용이고, 뒷 절은 앵앵의 어머니가 혼약을 파기하는 장면이 주 내용이다. 〈請宴〉은 앵앵의 시비 紅娘이 연회에 장군서를 초청하러 가는 대목인데, 홍낭의 唱詞를 통해 장군서와 앵앵의 들뜬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 편의 구조적 위치에 대한 김성탄의 견해는 앞 〈酬韻〉에 대한 그것과 비슷하다. 성격이 뚜렷한 사건 사이에서 자칫 싱거워지기 쉬운 부분이지만, 극미한 세계에 대한 정미한 묘사로 독자적인 생동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여기 해당하는 원문은 아래와 같다. (틀린 글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시간이 넉넉치 않아 번역은 뒤로 미룬다. 예기치 않았던 연결의 발생, 이런 공부가 즐겁다!
曼殊室利菩薩好論極微, 昔者聖歎聞之⽽甚樂焉. 夫娑婆世界, ⼤⾄⽆量由延, ⽽其故乃起於極微. 以⾄娑婆世界中間之⼀切所有, 其故⽆不⼀⼀起於極微. 此其事甚⼤, ⾮今所得論. 今者, ⽌借菩薩極微之一言, 以觀⾏⽂之⼈之⼼.
今夫清秋傍晚, 天澄地徹, 輕雲鱗鱗, 其細若縠, 此真天下之⾄妙也. 野鴨成群空⻜, 漁者羅⽽致之, 觀其腹⽑, 作淺墨⾊, 鱗鱗然猶如雲天, 其細若縠, 此⼜天下之⾄妙也. 草⽊之花於跗萼中, 展⽽成瓣, 苟以閑⼼諦視其瓣, 則⾃根⾄末, 光⾊不定, 此⼀天下之⾄妙也. 燈⽕之焰, ⾃下達上, 其近穗也, 乃作淡碧⾊, 稍上作淡⽩⾊, ⼜上作淡⾚⾊, ⼜上作乾紅⾊, 後乃作⿊煙, 噴若細沫, 此⼀天下之⾄妙也. 今世⼈之⼼, 豎⾼橫闊, 不計道⾥;浩浩蕩蕩, 不辨⽜馬. 設復有⼈, 語以此事, 則且開胸⼤笑, 以爲⼈⽣⼀世, 貴是⾐⻝豐盈, 其何暇費爾許⼼計哉! 不知此固⾮不必費之閑⼼計也.
秋雲之鱗鱗, 其細若者, 以有無相間成⽂, 今此鱗鱗之間, 則僅是有無相間⽽已也耶! ⼈⾃下望之, 去雲不知幾千百⾥, 則見其 鱗鱗者, 其間不必曾⾄於⼨. 若果就雲量之, 誠未知其爲尋爲丈者也. 今試思以爲尋爲丈之相去, ⽽僅⽈有無相間焉而已, 則我⾃下望之, 其爲妙也, 決不能以⾄是. 今⾃下望之, ⽽其妙⾄是, 此其⼀鱗之與⼀鱗, 其間則有⽆限層折, 如相委焉, 如相屬焉, 所謂極微, 於是乎存, 不可以不察也. 天雲之鱗鱗, 其去也尋丈, 故於中間有多層折, 此猶不⾜論也. 若夫野鴨腹⽑之鱗鱗, 其相去乃⾄爲逼迮, 不啻如粟⽶焉也. 今觀其輕妙若, 爲是⽌於有⽆相間⽽已也耶! 如誠⽌於有⽆相間焉⽽已, 則我試取纖筆, 染彼淡墨, 縷縷畫之, 胡爲三尺童⼦, 猶⼤笑以爲甚不似也. 則誠不得離朱其⼈, 諦審熟睹焉⽿. 誠諦審⽽熟睹之, 此其中間之層折, 如相委焉, 如相屬焉, 必也⼀鱗之與⼀鱗, 真亦如有尋丈之相去. 所謂極微者, 此不可以不察也.
草⽊之花, 於跗萼中, 展⽽成瓣. ⼈⽈:“凡若幹瓣, 斯一花矣.” 人固不知昨日者, 殊未有此花也. 更昨日焉, 乃至殊未有此萼與跗也. 於⽆跗⽆萼⽆花之中, ⽽歘然有跗, ⽽歘然有萼, ⽽歘然有花, 此有極微於其中間, 如⼈徐⾏, 漸漸⾄遠. 然則⼀瓣雖微, 其⾃瓣根, ⾏⽽⾄於瓣末. 其起此盡彼, 筋轉脈搖, 朝淺暮深, 粉稚⾹⽼. ⼈⾃視之, ⼀瓣之⼤, 如指頭⽿. ⾃花計焉, 烏知其道⾥不且有越陌度阡之遠也. ⼈⾃視之, 初開⾄今, 如眴眼⽿. ⾃花計焉, 烏知其壽命不且有累⽣積劫之久也. 此亦極微, 不可以不察也. 燈⽕之焰也, 淡淡焉, 此不知於世間五⾊爲何⾊也. 吾嘗相其⾃穗⽽上, 訖於煙盡, 由淡碧⼊淡⽩, 此如之何其相際也? ⼜由淡⽩⼊淡⾚, 此如之何其相際也? ⼜由淡⾚⼊乾紅, 由乾紅⼊⿊煙, 此如之何其相際也? 必有極微於其中間, 分焉⽽得分, ⼜徐徐分焉⽽使⼈不得分, 此⼀⼜不可以不察也.
⼈誠推此⼼也以往, 則操筆⽽書鄉黨饋壺漿之⼀辭, 必有⽂也. 書⼈婦姑勃豀之⼀聲, 必有⽂也. 書塗之⼈⼀揖遂別, 必有⽂也. 何也? 其間皆有極微. 他⼈以粗⼼處之, 則⽆如何, 因遂廢然以擱筆⽿. 我既適向曼殊室利菩薩⼤智門下學得此法矣, 是雖於路旁拾取蔗滓, 尚將涓涓焉壓得其漿滿於⼀⽯, 彼天下更有何逼迮題, 能縛我腕使不動也哉!
讀⻄廂記⾄借廂後, 鬧齋前, 酬韻之⼀章, 不覺深感於菩薩焉. 尚願普天下錦繡才⼦, 皆細細讀之! 上⽂借廂⼀章, 凡張⽣所欲說者, 皆已說盡. 下⽂鬧齋⼀章, 凡張⽣所未說者, ⾄此後⽅才得說. 今忽將於如是中間寫隔牆酬韻, 亦必欲洋洋⾃爲⼀章, 斯其筆拳墨渴, 真乃雖有巧媳不可以⽆⽶煮粥者也. 忽然想到張鶯聯詩, 是夜則爲何⼆⼈悉在⽉中露下! 因憑空造出每夜燒⾹⼀段事, ⽽於看燒⾹上⽣情布景, 別出異樣花樣. 粗⼼⼈不解此苦, 讀之只謂⼜是⼀通好曲, 殊不知⼀字⼀句⼀節, 都從⼀⿉⽶中剝出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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