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1962년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이 간행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다. 서울과 부산이 잠깐 나오는 것 외에, 서사는 오직 통영을 배경으로 한다. 모든 사건이 펼쳐지는 장소는 실제 지명을 사용하였다. 통영이 있어 서사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어 통영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소설 한 편은 박경리가 고향 통영에 남긴 영원한 선물이다. 이 소설로 통영은 나의 고향이 되었다. 아래는 1872년 지방지도 통영지도(규장각)에 소설에서 소개된 몇몇 지명을 표기해본 것이다.
소설의 1부 1장의 제목은 '통영'이다. 홍명희가 "임꺽정"에서 했던 것처럼 박경리도 서사를 펼치기 전에 통영의 전체 지도를 그려놓는다. 박경리는 이후 "토지"에서 다시, 그리고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그렇게 한다. 아래는 1978년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한국현대문학전집 20에 실려 있는 "김약국의 딸들" 서두이다.
제 1 장
1 統營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역시 섬과 별 다름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 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빼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연 어업에, 혹은 어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면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통영 근해에서 포획하는 해산물이 그 수에 있어 많기도 하거니와 고래로 그 맛이 각별하다 하여 외지 시장에서도 비싸게 호가되고 있으니 일찍부터 이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벌과 토지를 가진 지주층들(대개는 하동, 사천 등지에 땅을 갖고 있었다)보다 어장을 경영하여 수천 금을 잡은 어장아비들의 진출이 활발하였고, 어느 정도 원시적이기는 하나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그 결과 투기적인 일확천금의 꿈이 횡행하여 경제적인 지배계급은 부단한 변동을 보였다. 실로 바다는 그곳 사람들의 미지의 보고이며 흥망성쇠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타관의 영락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광도면 죽림리, 북쪽 신시와 남쪽 원시 사이 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 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온 말일 게다. 어쨌든 다른 산골 지방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어업 외의 규모가 작지만 특수한 수공업도 이곳의 오랜 전통의 하나이다. … 통영갓 … 통영소반 … 나전 기물 …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배나 찔러 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칠은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1864년 …
이 무렵의 통영 항구를 점묘해 보면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짤리어서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은 북장대 줄기를 타고 뻗은 안뒤산이 시가를 안은 채 고깃배가 무수히 드나드는 바다를 내려보고 있었다. 안뒤산 기슭에 동헌과 세병관(洗兵館) 두 건물이 문무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시가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과 동문, 남문 중간에 있는 시구문을 합하여 모두 다섯 개의 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동헌에서 남문을 지나면 고깃배, 장배가 밀려들어오는 갯문가, 둥그르름한 항만이다. 항만 입구 오른편이 동충(항남동, 동충로, 동춘)이며 왼편이 남방산(남망산, 동호동 일대)이다. 이 두 끄트머리가 슬며시 다가서서 항만을 감싸주며 드나드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충과 남방산 사이에는 나룻배가 수시로 내왕한다. 항구에 서면 어떻게 솔씨가 졌는지 소나무 한두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장난감 같은 공지섬이 보이고 그 너머 한산섬이 있다. 여기서 거제도는 아득하다.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셈이다. 간창골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그곳을 일컬어 서문고개라 한다. 서문 밖에는 안뒤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이곳의 성지라 할 만한 지역이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노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뒷당산과 마주보는 곳이 안산이다. 안산을 넘어가면 작은개, 큰개, 우룩개가 있어 봄이면 멸치 떼가 시뻘겋게 몰려든다.
명정골 우물에서 서문고개로 가는 길을 되돌아서면 대밭골이다. 대밭골에서 서문고개 가는 길과 갈라진 길을 접어들어 줄곧 나가면 판데(충무교 아래 운하)로 가게 된다. 판데는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에 쫓긴 왜병들이 그 판데목에 몰려서 엉겁결에 그곳을 파헤치고 한산섬으로 도주하였으나 결국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데라고 부른다. 판데에서 마주보이는 미륵도는 본시 통영과 연결된 육로였는데 그러한 경위로 섬이 되었다. 미륵도에는 봉화를 올리는 고봉 용화산이 있고, 그 이래에 봉수골, 더 내려오면 통영 항구가 바라보이는 해명나루가 있다. 바다에 가서 죽은 남편이 뒤따라 순사한 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용화산을 넘어서면 첫개와 그 밖에 소소한 어촌이 있고 넓은 바다를 한 눈으로 굽어보는데, 대충 큰 섬만 추려도 사랑섬, 추도, 두미도, 욕지섬, 연화도 등 많은 섬들이 있다. 되돌아와서, 통영 욕지도 막바지인 한실이라는 마을에서 보는 판데는 좁다란 수로다. 현재는 여수로 가는 윤선의 항로가 되어 있고 해저 턴넬이 가설되어 있다. 왜정시대는 해저턴넬을 다이꼬보리(豐臣秀吉의 존칭인 太閣이 팠다는 왜말)라 불렀다. 역사상으로 풍신수길이 조선까지 출진한 일이 없었는데 일본인들까지 해저턴넬을 다이꼬보리라 불렀으니 우습다.
동헌에서 비스듬이 동쪽으로 길을 건너 솟은 것은 당산(충무교 건너 남쪽, 해발 73.5m)이다. 당산은 동헌과 건너다보이는 곳이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당산에 올라 사또에게 그 억울한 사연을 외치며 호소했던 것이다. 당산 옆을 빠져서 돌아가면 동문이다. 동서문에 얼마간 떨어진 곳에 시구문이 있고 시구문 주변은 장터였다. 이 두 문 밖에도 막바지는 바다였다. 그 바닷가에 멘데(아마 먼 곳이란 뜻, 정량동, 남망산 동북쪽)라는 가난한 어촌이 있어 밤낮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부들은 손바닥만한 통구맹이(한 둘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손질하고 어망을 깁는다. 아낙들은 생선과 해초를 모래밭에 널면서 구름을 보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가슴 졸이는 하루살이 살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보이는 바다에 지도라는 섬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헌 뒤켠으로 빠지는 북문, 이것만이 육일한 육로다. 섬의 신세를 면한 길목이다. 토성골을 지나 붉은 황토길은 장대고개를 넘어서 가을이면 통영의 지주들이 당나귀를 타고 고성으로 사천으로 추수를 거두러 가고, 봄이면 춘궁을 모면키 위하여 어촌의 아낙들이 마른 생선과 해초를 푸대에다 꾸려서 이고 곡식 도붓길을 떠나는 슬픈 고개다. 장대고개에는 묘지가 있었다. 그리고 문둥이들이 떼거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문둥이들은 봄 가을에 합동결혼식을 한다. 그들이 짝을 짓는 방법은 각자의 바가지를 엎어 놓고 바가지를 집는 처녀 문둥이가 바가지 임자인 총각 문둥이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이 합동결혼식 때 일수 사나운 나그네가 지나가다 걸려들면, 문둥이들은 잔칫술 마시고 가라면서 잡아끄는 바람에 나그네는 진땀을 빼곤 한다. 문둥이들은 장대 근방의 황토 지역을 일궈 고구마, 감자를 심고 호박, 배추도 심어 장사치들에게 몰래 넘겨주는데, 황토에서 나는 고구가, 호박이 어떻게나 컸던지 사람들은 묘지에서 송장 썩은 물이 흘러서 그렇느니, 문둥이들의 거름이 걸어서 그렇느니, 하며 장터에서도 유별나게 큰 고구마, 호박같은 것은 사가기를 꺼려 하였다.
이 고을에 김봉제(金奉濟) 형제는 살고 있었다. 형인 봉제는 조상때부터 살던 간창골 묵은 기와집에 있었고, 동생 봉룡(奉龍)도 역시 간창골에 살고 있었지만 형네 집과 뚝 떨어진 안뒤산 기슭의 청기와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부모 생존시부터 봉룡의 몫으로 신축한 집이었다. 형네 집보다 산뜻하고 운치 있는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