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와 역사 (김범준의 옆집 물리학)
아침 신문에서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리학의 다음과 ‘다음 소희’는 지금이 정한다"를 읽었다. 물리학자답게 물리를 활용하여 사회 문제를 읽은 글이다. 글을 읽으며 작가, 또는 문학연구자는 빈 정원, 빈 집을 지키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창작이든 연구든 문학의 고유 역할은 '표현을 다듬는 修辭'와 '얼개를 짜는 構成' 두 가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지식은 외부에 있으니, 문학이 하는 일은 이를 들여 새롭게 표현하고 구성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 말이다. 어쨌든 좋다, 글을 잘 읽었다는 뜻이다.
이 글은 물리학의 법칙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물리학의 다음은 지금이 정한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에 주어지는 지금의 힘이 지금의 가속도(加速度)를 결정한다. 지금의 가속도를 알면 다음의 속도를 알고, 지금의 속도를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다음을 알아내는 과정을 시간 축을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계속 이어가면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고전역학으로 이해하는 운동 중 가장 간단한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없는 경우다. 힘이 없으면 가속도가 없고, 가속도가 0이면 속도(速度)에 더해지는(加) 것이 없어 다음의 속도는 지금의 속도와 같다. 물체는 지금의 속도와 정확히 같은(等)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등속(等速) 운동을 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속도는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화살표처럼 방향과 크기를 함께 갖는 벡터다. 등속으로 운동해 속도가 늘 같다는 말은 물체가 움직이는 빠르기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속 운동을 하는 물체는 늘 속도가 같아서 시간이 지나도 늘 같은 빠르기로, 그리고 늘 같은 방향인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 힘이 없다면 다음은 지금과 늘 같다. 고전역학의 다음을 지금과 다르게 하는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다. 가벼운 물체의 다음 경로를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질량이 작은 물체는 약한 힘에도 크게 반응해 커다란 가속도를 만들어 속도를 크게 바꾸고 미래의 위치도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질량이 커 관성도 큰 물체는 지금과 다른 다음을 위해서 큰 힘이 필요하다. (단락 합침)
중력의 법칙에 작용하는 건 속도가 아니라 가속이라는 말은 처음에도 이해 못했고, 지금도 이해 못한다. 그런데 위 단락이 말하고자는 건 알 거 같다. 대략 이른 말이다.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없으면, 물체의 속도와 방향은 달라지지 않는다. 속도와 방향을 바꾸려면 힘이 필요한데, 질량이 큰 물체에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글은 이제 사회로 넘어간다.
사회와 시대에도 관성이 있다. “원래 늘 그랬던 것인데 뭘 유난하게”의 마음가짐이 사회의 관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세상에 “원래 그랬던 것이어서 다음에도 늘 그럴 것”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험하고 목격했던 학교에서의 체벌은 이제 먼 과거의 얘기고, 도대체 여자가 무슨 법대를 가고 의대를 가냐는 그릇된 생각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눈 질끈 감으면 다음은 지금과 같아서, 다음을 바꾸려면 지금 바꿔야 한다.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를 인상 깊게 관람했다. 최준영 작가의 인문학공동체 수원 ‘책고집’에서 열린 감독과의 대화시간에도 참석했다. <다음 소희>는 현장실습을 나간 한 특성화고 학생 소희의 이야기다. 소희의 안타까움에 관객이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영화지만, 영화 속 여러 가해자는 다른 의미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소희의 자살 이전 자취를 따라 범인(犯人)을 쫓는 형사가 결국 마주친 이들은 숱한 범인(凡人)이었다. 엄청난 관성을 가진 거대한 사회 구조는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계층구조의 연쇄 사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슬의 가장 끝단에 소희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런 명제가 전제되어 있다. "사회의 작동과 물체의 운동에는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사회는 물리와는 다른 세계이다. 물리보다 훨씬 복잡하고 모순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명징한 수식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소희는 명백한 피해자인데, 가해자를 추적해보니 그 또한 또 다른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가해자는 누구인가? 아마 가해자를 추적해보면 그 또한 다른 폭력의 피해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되는 사회의 폭력 구조를 암시한다. 이런 구조를 바꾸는 일은 단순히 한두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물리학은 이 이상 도와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만한 통찰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안에 접근하는 선명한 경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금과 다음, 힘과 가속과 변화의 관계는 역사의 문제의식에 대응된다. 역사는 표면상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영역이지만, 궁극에는 '지금의 실천과 미래의 설계'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임무가 과거를 밝히는 일에 한정된다면, 사람들이 역사 문제로 다투거나 싸울 일은 없다. 지금 어떤 힘을 가할 것인가 하는 물리의 문제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감시하고, 누구와 연대하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역사의 문제로 옮겨간다. 글은 이렇게 끝난다.
영화 제목 <다음 소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인 소희의 안타까운 죽음 뒤에도 이어질 다음 소희를 일반명사로 말한다. 힘이 존재해야 지금과 다른 다음이 만들어지는 물리학을 떠올리며, 모두의 힘이 함께 모여 달라질, 다음 소희가 사라진 소희 다음을 소망한다. ‘다음에도’를 ‘다음에는’으로, 그리고 ‘결코 다시는’으로 바꾸는 것은 여럿의 부릅뜬 눈이다. 세월호·이태원 참사를 겪고 <다음 소희>를 보면서 ‘결코 다시는’을 애써 떠올린다. 다음에는 달라질 것이라 누가 말하면 다음이 도대체 언제냐고 따져 물을 일이다.
이런 글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생물학자는 생물학으로, 기계공학자는 아니 엔지니어는 기계로, 바리스타는 커피로, 작고 구체적인 사물과 법칙으로 인생과 사회와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나같은 문학연구자는 그저 읽고, 해석하고, 정리하고, 필요하면 이러한 글의 방법과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