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김시습의 잡념과 시
민머리에 패랭이를 썼고, 죽장을 짚었으며 바랑을 졌다. 그저 行脚僧의 차림이다. 말없이 합장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사람도 있으며, “어디로 가시우?” 선선하게 말을 거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 줄 모른다. 다리는 아프고, 정처도 없다. 떠나온 곳이,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이런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한다. 갖가지 생각이 끝과 끝을 오간다. 후회? 불안? 창피? 두려움? 이런 마음을 누르기 위해서 자꾸 다짐을 한다. 어떤 생각을 명확하게 하는 데는 시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자꾸 시를 짓는다. 최소한 시를 구상하는 동안에는 번뇌 망상이 준동하지 않는다. 시의 언어로 금강역사의 눈을 삼고, 사천왕의 두 발을 삼고, 석가의 말씀을 삼는다. (우리가 만나는 김시습은 역사의 평가를 받은, 역사에 의해 그 형상이 완성된 인물이며, 그 역사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의 시에 나오는 아래 구절들은, 25살 김시습이 마음 여기저기서 꿈틀거리는 잡념과 망상들과 싸우면서 만들어낸 구절들이다.
우리는 담박하고 깨인 사람인지라 我曹自是淡宕人
만 리를 집 삼아 마음도 드넓어라 爲家萬里心恢恢
…
살아서 벼슬에 얽매이기 원하지 않고 不願簪笏絆身前
죽어서 이름이 빛나기도 바라지 않네 不願芳聲耀身後 「渡迷峽」
스스로 세상 버려 동서를 떠돌으니 自從遺世西復東
가슴속의 기개가 크고도 드높아라 胸中氣槩多磊砢
필경에 어떤 것을 이웃으로 삼으려나 畢竟底物爲保伍
강 밖에 푸른 산이 천만 송이라 江外碧峯千萬朶 「渡龍津」
세간의 온갖 일이 봄꿈이러니 世間萬事屬春夢
오대산에 가 은자를 찾으려네 我向五臺尋隱淪
하늘 보며 크게 웃고 호연히 가니 仰天大笑浩然去
우리 어찌 좀스러운 사람일거나 我輩豈是蟲臂人 「宿桐花寺 原州」
장부는 살았다면 원유를 사랑하니 丈夫未死愛遠遊
마른 참죽나무처럼 오도마니 앉았으랴 豈肯兀坐如枯椿
승경 찾아 평생을 살아가리니 且窮勝景作平生
그 기운 우뚝하여 낮아지지 않으리 其氣崒嵂何由降 「宿覺林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