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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註釋), 마르크스(1818-1883)와 스타인벡(1902-1968)

검하객 2023. 6. 22. 23:07

  '註' 자는 "설문해자"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글자는 '注' 자와 통용된다. '注' 자는 갑골문에 처음 보이는데, 물이 그릇 안으로 떨어지는 형상을 그렸다. 뒤에 본문 안에 삽입하여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사용이 많아지면서 '註' 자로 대신하게 되었다. '註'는 본문에 대한 보충 설명을 뜻한다. 본문 사이에 두면 협주(挾註), 본문 아래 두면 (脚註), 본문이 다 끝난 뒤에 두면 (尾註), 본문 맨 앞에 두면 두주(頭註)라 한다.  

  제자들이 육구연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선 왜 책을 쓰지 않으십니까?" 다소 불만이 섞인 말투가 아니었을까? 당대의 맞수로 일컬어진 주희는 엄청난 저술가였다. 육구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삶은 육경에 대한 풀이이고, 육경은 내 삶에 대한 풀이이다. 我註六經, 六經註我." 내 삶이 곧 육경 가르침의 실천이고, 육경의 내용이 곧 내 일상 실천에 대한 주해라는 뜻이다. 지리 번쇄함을 좋아하지 않았던 육구연다운 발언이다.

  나는 글을 쓰지 않는다. 가끔 나는 좋은 글을, 또 많은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렇다고 육구연처럼 내 삶을  성인의 주석으로 삼고 싶진 않다. 그러다가 그제 오대산을 걸으며 깨달았다. 나는 여러 번의 전생에서 많은 글을 썼다. 많은 필업(筆業)을 지은 셈이다. 금생에 태어나 고전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그 과보(果報)인 셈이다. 네가 지은 업을 네가 해결하라, 하여 나는 내가 전생에서 지은 글들에 열심히 주석을 달고 있는 것이다. 새로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최근 한동안 내 가방에는 두 권의 책이 늘 들어있다. 하나는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1844, 김태경 옮김)이고, 다른 하나는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1939, 전형기 옮김)이다. 1844년과 1939년에 발표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1989년에 간행되었으니 오래된 책이다. 사실 잘 안 읽힌다. 그런데 왜 난 읽지도 않으면서 이 두 권을 세트로 가방에 넣어다닐까? 첫째, 최근 나는 노동자로서의 신분을 자각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며, 둘째, "분노의 포도"는 이야기 전체가 마르크스의 저서에 대한 주석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지기도 한다.

 

  "경제학 - 철학 수고"의 첫 주제는 '임금'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대단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살이었다. 

 

  노동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자본가 편에서 본 승리의 필연성.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생존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노동자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자본가들 사이의 결합은 상습적이고 효과적이지만, 노동자들의 결합은 금지되어 있고 노동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그밖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그들의 소득에 기업의 이득을 추가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의 수입에 지대나 자본의 이자를 추가할 수 없다. ... 노동임금의 최저 가격, 노동임금에 꼭 필요한 가격은 노동하는 노동자의 생계비이며, 노동자가 그 가족을 부양하며 노동자 종족이 멸종되지 않을 정도의 가격이다. 스미드에 따르면 통상적인 노동임금은 비천한 인간생활 곧 가축의 생존과 부합하는 최저임금이다. (김태경 옮김, 이론과 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