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쿤데라의 시간

검하객 2023. 7. 17. 00:01

  내가 읽은 쿤데라의 작품은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의 책"이 전부이지만, 아마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시간은 1968년에 고정되어 있다. 그 이전의 시간은 보헤미아 공산당의 서곡을 알린 1948년 2월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관류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기억'이다. 체코 공산당, 그 배후의 러시아 공산당은 전체 인민을 위한 그들의 목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이들은 모두 제거, 축출, 숙청했다. 그들에게서 기억의 자유를 박탈했고, 기존의 기억을 강제로 말소했으며, 새로운 기억을 강요했다. 쿤데라에 그건 능욕이었고 모독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외려 사소하고 가볍고 개별적인 사건들을 내세워, 거기에 저항했다. 그의 소설쓰기는 (권력에 의한) 망각에 대한 기억 투쟁의 과정이고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의 글에서 난 그의 수모감, 모욕감, 처절한 패배감, 그리고 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느낀다. 어떻게? 그건 나의 수모감이고 모욕감이며 패배감이기 때문이다.  

 

  "때는 1971년, 미레크는 말한다.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고."

  "아옌데(칠레 32대 대통령) 암살(1973)은 러시아의 보헤미아 침공에 관한 기억을 금세 뒤엎어 버렸고, 방글라데시 유혈 사태는 아옌데를 잊게 했으며, 시나이 사막 전쟁은 방글라데시의 울부짖음을 뒤덮었고, 캄보디아 학살은(1975~1979) 시나이를 잊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잊을 때까지 사건이 이어졌다."

  "1968년 8월 21일, 러시아는 보헤미아에 50만 군대를 보냈다. 얼마 후 2만 체코인이 나라를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 가운데 50만쯤이 일자리를 포기하고 오지의 갱 속 작업장으로, 먼 공장으로, 트럭 운전대를 잡으러, 다시 말해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장소로 떠나야만 했다.

  나쁜 기억의 그림자가 끼어들어 나라의 관심을 복원된 목가가 아닌 다른 쪽으로 돌려놓지 못하게 하려면 프라하의 봄과 소련군 탱크의 진입, 아름다운 역사에 남은 이 오점이 없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날 보헤미아에서는 8월 21일 기념일이 조용히 지나가며, 자신의 청춘기에 대항해 일어섰던 사람들의 이름들도 마치 초등학생 숙제에서 잘못이라도 지우듯 나라의 기억에서 세심히 지워졌다."

  "미레크는 공산당이 그러듯, 모든 당이 그러듯, 모든 민족이, 인간이 그러듯 역사를 다시 썼다. 사람들은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다고 외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미래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무심한 공허에 불과할 뿐이지만 과거는 삶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얼굴이 우리를 약 올리고 화나게 하고 상처 입혀,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거나 다시 그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전기와 역사를 다시 쓰고 사진을 다시 손볼 수 있는 암실에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잃어버린 편지들)

 

  " 프란츠 카프카가 기억 없는 세상의 예언자라면 구스타프 후사크(1913~1993)는 그런 세상의 건설자다. 해방자 대통령이라고 불린 T.G. 마사리크 대통령 이후에(그의 기념물은 예외 없이 깡그리 파괴되었다.) 베네스, 고트발트 …를 거쳐 그가 우리나라의 일곱 번째 대통령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망각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러시아가 그를 1969년에 권좌에 앉혔다. 1621년 이후로 체코 민족의 역사는 이런 문화 말살과 지식인 말살을 겪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후사크가 자신의 정적들을 박해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 세력과의 싸움은 오히려 러시아에게는 그들의 대리인을 매개로 훨씬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시도하기 위한 이상적인 기회였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후사크가 대학들과 학술 연구소들에서 체코 역사학자 백마흔 다섯 명을 쫓아낸 건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학자가 한 사람씩 사라질 때마다 마치 동화에서처럼 신기하게도 레닌의 새로운 동상이 보헤미아 곳곳에서 돋아났다.)" (천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