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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검하객
2023. 12. 16. 10:32
눈이 내린다
땅과 하늘 사이에
눈이 날린다
지붕 위에도
장독 위에도
수유 나무 가지 끝에도
그리고 아버지 산소 위에도
소리 없이
눈이 쌓인다
서둘러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쓴다
눈이 와요
동유럽 작은 도시의
어떤 청년에게
두만강을 건너는 여인에게
오늘 아침 방에서 나와
울음 섞인 눈으로
내게 안기던 소녀에게
이제는 여기 행적을
모두 잊은 채
어디선가 새로 살고 있을
창학에게
성욱에게
툇마루에서 떨어져
그저 울던 아우에게
이국의 형무소에서 죽어가며
말없이 나를 부르던 옛 친구
단재에게
동주에게
육사에게
올봄부터 자취를 감춘
길냥이 프레드에게
업보로 삼생을 떠돌다가
다시 업을 지으러 날 찾아온
업객(業客)들에게
편지를 쓴다
눈이 와요
거기도 눈이 오나요
라고 쓰려 했는데
마저 다 쓰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다
아버진 지금도 날 기억할까
시간이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