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삼연단상(讀三淵斷想) 2, 갈역(葛驛) 지명의 유래
1711년(59세) 삼연은 백담사 골짝 입구(지금의 용대2리)에서 시를 지어 아들 양겸(養謙)에게 부쳤다. (「백담 골짝 입구에서 흥대로 읊어 아들 양겸에게 보내다, 谷口漫詠寄養兒」) 이 시에서 삼연은 온 나라가 과거에 미친 세태를 지적하며, 역시 그 풍조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들을 은근히 걱정했다. 여기서 삼연은 자신을 ‘산골을 헤매는 미친 인간(走峽奴)’으로 일컬었다.
一國如狂是宦途, 癡兒亦復冒塵趨. 雞難棄肋身爲絆, 鮎欲登竿計則迂.
十口眼穿黃綬望, 三邊夢斷錦帆虞. 京居况味知甘苦, 桂盡千巖走峽奴. (권 10)
이 시에 이어 「춘흥잡영(春興雜詠)」 46수가 실려 있다. 첫 수에서는 봄날 산으로 둘러싸인 인제의 지세로 시작하여, 연하(煙霞, 자연을 의미)의 주인이 된 지 6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시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는 말로 시상을 맺었다. 그리고 5, 6구에서 갈역(葛驛)을 유완(劉阮)의 마을에, 남교(藍橋, 지금의 남교 마을로 옛날 여기 역참이 있었음)를 약야계(若耶溪)에 견주었다. 유완은 후한 시기 유신(劉晨)과 완조(阮肇)의 병칭이다. 두 사람이 천태산에 올라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었어 두 선녀를 만나 반 년을 지내다 돌아왔는데 이미 일곱 세대나 지났고, 다시 산에 올랐지만 옛 자취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남조 南朝 宋나라 劉義慶이 지은 『幽明錄』에 실려 있다. 소흥(紹興)의 약야산(若耶山)에서 발원한 시내로, 서시(西施)가 일찍이 여기에서 깁을 빨았다 하여 일명 완사계(浣紗溪)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연(蓮)으로 이름난 곳이다. ‘갈역’은 1698년 곡운이 삼연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지명으로 쓰였고, 이것이 두 번째이다.
春氣氤氳大嶺西, 山靑水綠繞麟蹄. 問津往往漁舟逗, 伐木丁丁幽鳥啼.
葛驛如窺劉阮洞, 藍橋宛入若耶溪. 六年余作煙霞主, 猶有巖泉漏品題.
그리고 아래는 세 번째 시이다.
巖阿抱犢此其門, 自我開荒作一村. 短塔玄龜當戶伏, 巨巖靈鷲向簷蹲.
桑麻日影千峰靜, 雞犬風聲萬瀨喧. 坐樹濯泉於分足, 吾將以此遺兒孫. (3)
포독(抱犢)은 전설의 지명이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복지(福地)를 뜻한다. 제 환공(齊桓公)이 사슴을 쫓아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한 노인에게 지명을 물으니 우공(愚公)의 골짜기라 하였다. 그 산마루에 평탄한 분지(盆地)가 있어 난리 때에 피란민이 송아지를 안고 올라가 화를 모면했으므로 포독복지(抱犢福地)라 하였다.(『太平御覽』) 바위 포독산은 영시암 일대를 가리키고, 문은 그 입구에 해당하는 갈역리(용대2리)를 뜻한다. 2구가 시선을 잡는다. 이 마을은 삼연 자신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19세기 지도에는 이 마을이 가력리(加曆里)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원래 있던 가력리를 삼연이 갈역리로 표기한 게 아니라, 삼연이 붙인 이름 갈역리가 뒷날 ‘가력리’로 음사되었다는 뜻이 된다.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