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덴동어미화전가, 봉서루 전설, 성황제

검하객 2013. 4. 26. 10:56

<덴동어미화전가>는 순흥 비봉산에 화전놀이 간 영주 아낙들 중 덴동어미의 기구한 삶을 1인칭 화법으로 풀어낸 808구 가사이다.

 순흥에는 비봉산과 봉서루와 봉황의 알에 얽힌 전설과 유적이 전한다.

 비봉산 성황제는 매우 특별한 마을 제의로 2003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촬영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있다.

 국문과의 답사는 이런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현장을 찾는 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돌아나오는 길에 여적으로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들러야지.

 아래는 영주문화원에서 공개한 봉서루 전설이다.  

 

 옛날에 순흥은 한산한 고을이었다. 하루는 지리에 능통한 이인(異人)이 나타나 지형은 번성할 곳이나 앞이 너무 허해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의 봉이 남쪽으로 날아가 이곳이 흥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있던 고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자 남쪽에 큰 누각을 짓고 오동나무를 심어 봉이 못 가도록 알을 만들어 두면 이 지방이 흥하고 명인이 많이 날 것이라고 하고 사라져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너무 이상해서 서로 수의를 거듭한 결과 읍에서 남쪽 1.5㎞되는 곳에 큰 누각을 짓고 봉서루라고 이름하고 그 옆에 흙을 쌓아 봉의 알을 세 개 만들고 누각 앞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어 두었다. 몇 년 안가서 이인(異人)이 말한대로 글 잘하는 선비와 이름난 무인이 나고 또 고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수 백년이 흘러 일제 시대가 되어 새로운 교육제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0년경에 보통학교를 이 공청(空廳)을 이용해서 세우게 되었다. 1927년경에 와서는 6년제 보통학교가 12학급이 되어 봉서루 상하층 두교실을 사용하고도 두교실이 모자라게 되었고 당시 면사무소는 옛날 동헌을 사용했으나 너무 헐어서 개축을 해야 될 판이었다. 지방 유지들이 봉서루와 페문루를 합해서 면사무소를 짓고 순흥 보통학교에서 동편으로 4개 교실을 연장해서 동서로 길게 짓기로 했다. 그래서 3월에 봉서루를 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밤에 목수가 꿈을 꾸니 봉서루에서 큰봉이 날아 자기 앞에 와서 "너는 왜 내가 천년동안 살아온 집을 허느냐? 만일 네가 중지 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 것이다"하고 가는 것이었다. 꿈이 깬 다음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발설도 아니하고 봉서루를 다 헐었다. 12개 교실 동쪽편의 교상 목수간을 만들고 거기에 교실 지을 나무를 많이 갖다 놓고 대패질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로 간 다음 담배불이 대패밥에 붙어 그불이 천장을 통해 12개 교실 서편부터 연기가 나면서 동시에 불이 붙게 되어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책보를 둔채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책도 다 타고 학교의 비품도 다 타버렸다. 순흥, 풍기, 영주의 소방차가 왔으나 너무 화력이 강해서 소방호스의 물이 화염을 뚫지 못하고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봉서루 앞에 큰 오동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그 생나무에 불이 붙어 타고 말았다. 그 나무속에 있던 봉서루 지키미 큰구렁이도 타 죽고 말았다. 그후 순흥 보통학교는 지방민의 여론에 따라 읍내로 옮겨지고 봉서루는 현재의 면사무소 옆에 우뚝 솟아 있으나 순흥은 인물도 나지않고 지방의 번영이 점점 쇠해만 가고 있다. 봉서루는 최소한 800년은 되는 해묵은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유명한 안축 선생의 중수기가 그것을 말해주며 안축 선생은 약 700년전 사람이다. 오늘날 주민들은 모두 그때 봉서루를 헐어 읍내로 옮긴 것을 후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