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인의밤 / 건달
대소사는 예고도 없이 안팎에서 협공이라 촌각도 아쉬운 판국인데 아이들이 짧은 격려 글을 청해왔다. 바쁘다는 핑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통제하지 않고 키워드만 잡아 손길이 가는대로 몇 자 적어보았다. 상투적인 글보다 외려 이런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자위해본다.
-----------------------------------------------------------------------------------------------------------------------------
건달 찬
가죽점퍼에 가죽 부츠, 가죽 장갑,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긴 생머리 드리워 목덜미를 덮었다. 노래,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며 몸은 리듬을 탄다. 오토바이 아니면 자전거를 탈지언정 자동차는 몰지 않는다. 위태롭지 않고, 머리칼이 날리지 않고, 바람결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달이 뜨자 그도 깨어난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가슴에 품은 것은 서슬 퍼런 풍자의 비수, 장자의 선물이다. 허리춤엔 묵직한 질문의 철퇴, 니체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은유의 눈빛이 번뜩이고, 언어를 움켜잡는 손갈퀴가 날래고 억세다. 문득 달과 눈이 마주치자 도시의 건달은 늑대가 된다. 황야와 숲 사이를 늑대가 간다. 바람이 지나자 늑대 털들이 부드럽게 떨린다. 도시의 건달은 황야의 늑대이고 나는 숲속의 바람이다.
축사
샤라자드는 뚫어질 듯 왕의 두 눈을 쳐다보다가 문득 시선을 거둬 창문 밖 먼 곳으로 보냅니다. 샤리야르 왕은 시선도 홀린 듯 캄캄한 사막으로 향합니다. 농염한 자태로 왕의 얼굴을 품었다가 홱 몸을 돌려 침대를 내려갑니다. 왕의 두 손이 샤라자드를 쫓다 멈춥니다. 가끔은 생각에 잠기고, 때로는 노래를 불렀으며, 여러 인물의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다. 요술램프와 신밧드 이야기가 펼쳐지는 사이 며칠이 지났는지 모습니다. 왕은 밤새 이야기를 듣고 새벽녘이 되면 잠들었는데, 꿈에 지난밤에 들었던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박지원이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날 밤, 비장들이 연암의 방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소매 속에 독한 소주 몇 병과 조선에서 가져온 말린 홍합과 육포 약간을 챙겼습니다. 술기운이 오르자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들은 이야기를 자기가 본 듯이 말하고, 남 얘기를 자기 사연처럼 말합니다. 이야기를 꾸미다 보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자네들 허생이라고 들어보았나?” 박지원이 허생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만 크게 뜨는 사람도 있고, 안주를 집는 사람도 있고, 아는 척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날 밤 이야기판은 허생이 종적을 감추는 대목에 이르러 짧은 탄식과 긴 침묵으로 끝났습니다.
이야기는 주로 밤에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랍니다. 밤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야화(夜話)라고 합니다. 샤라자드의 이야기는 ‘천일야화’이고, 박지원의 이야기는 ‘옥갑야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국문인의 밤에 오가는 이야기는 행당야화가 됩니다. ‘국문인의 밤’에 많은 이야기들이 진진하게 오가고, 나아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잉태되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국문인의 밤’은 수많은 이야기를 낳아 기르는 대모(大母)가 되는 셈이지요. 2013년 ‘국문인의 밤’에 뜨거운 성원과 격려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