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고려의 외교 (퍼옴)

검하객 2014. 4. 9. 10:0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강대국을 쥐락펴락한 고려외교 (경향신문, 4월 9일)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고려처럼’만 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텐데….”(<광해군일기>) 1621년, 광해군이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촉구한다.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고, 떠오르는 후금을 깔아뭉개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럽게 여기면서….
 부러워할 만했다. 고려의 서희가 ‘세 치 혀’로 80만 대군을 앞세운 거란 소손녕과의 협상(983년)에서 ‘강동 6주’를 얻어내고,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 인정받은 것은 다 아 는 사실이니까. 서희의 후예는 세계제국이라는 몽골의 애간장도 녹였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질책하자, 고종은 이렇게 눙쳤다고 한다.(1231년)
  “백성이 다 흩어지면 어찌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섬(강화도)에 들어가 토산품이라도 바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했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1256년(고종 43년) 고려사신 김수강이 ‘개경환도’를 촉구하는 몽골 황제에게 했다는 기막힌 변명….
 “입장을 바꿔 생각해주소서. 짐승(고려)이 굴 속에 숨었는데, 사냥꾼(몽골)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찌 나오겠습니까.”(<고려사절요>)
  황제는 “네가 바로 참 사신”이라고 혀를 차며 군대를 돌렸다고 한다. 또 하나, 1차 침입(1231년) 이후 28년간이나 몽골의 애간장을 녹이던 고려가 화의를 청했다.(1259년) 이에 쿠빌라이는 “고려만은 스스로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말라”는 선심성 칙명을 내렸다.
  고려는 이 칙령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며 두고두고 써먹었다. 예컨대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를 흡수통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마침 원나라를 방문 중이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사진)이 정곡을 찔렀다.
“아니,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세조의 유훈’을 어쩌시려고요?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원 황제(영종)는 때마침 “세조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린 바 있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하며 은근히 압박한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절묘한 외교술이다. 원나라는 결국 식민지(정동행성)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조선의 광해군이 감탄사를 터뜨릴 외교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