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오사카의 이카이노 조선시장, 기가요마루

검하객 2014. 8. 7. 00:53

 

 산노미야역, 니시노미야(西宮), 쓰루바시역(鶴橋驛), 히라노(平野)강, 이마사토(今里), 다마쯔쿠리역

 

 히가시오사카(東大版) 지역의 이쿠노구(生野區) 이카이노(猪飼野) 조선시장

 

  조선시장은, 양준오가 일제시대부터 청년다운 정열로 반일감정을 불태우며 찬양하던 곳이다. 양준오는 남승지가 고베에서 오사카에 오면 함께 이카이노의 거리를 걸으며 이카이노예찬론을 열심히 펼치곤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이 아무리 황민화정책, 동화정책을 강행하고, 조선옷차림이나 조선말을 금지해도, 이카이노 같은 생명력이 있는 한, 일제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거기서는 조선인의 생활의 원형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불가사의한 생명력으로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관할 경찰서에서 조선촛차림을 금지한 적이 있다. 그래도 효력이 없자,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의 흰옷에 먹물로 ×자를 그리거나 경찰서로 연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선옷차림은 여전히 거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의식적인 저항 따위의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라, 식생활 습관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으로서의 생활의 필요성에서 나온 결과였다. --- 거기에는 잃어버린 말까지 있었다. 성과 국어와 글자까지 빼앗기고서도, 조선의 어머니들은 고향 사투리를 그대로 쓰고, 자식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기서는 아이들도 고향의 말을 기억한다. (김석범, 화산도 2책 297쪽)

 

 기미가요마루(君か代丸)는 당시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선의 하나로, 이 배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이 배는 본래 이름이 이그나티오 알간스키 백작호인 제정러시아의 배로, 발틱함대 소속의 작은 순시함이었다. 이 배가 노일전쟁 때 일본과의 해전에서 함미를 폭격당해 침몰하기 직전에 일본이 노획 - 즉 선미가 떨어져나간 채로의 수리였으므로, 굴뚝이 배 맨 끝에 세워져 있어 당장이라도 자빠질 듯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大正 10년(1921)에 접어들자 제주도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객선으로 취항했는데, 제주도 출신 사람들은 오사카로 많이 이주시킨 데에는 기미가요마루가 기여한 바가 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배를 기미가요마루라고 부르지 않고, 군대환이라는 조선식 음독으로 불렀다. 그렇게 하면, 기미가요라는 일본 특유의 뉘앙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무슨 약이름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249쪽)

 

  오사카의 이카이노, 또 가볼 곳이 생겼다. 뒤에 찾아본 바에 따르면 이카이노란 지명은 없어지고, 이 일대는 현재 이쿠노쿠(生野區)가 되어 있는 듯하다. 1925년 원산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제주도에 갔다가, 한국 전쟁 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시인 김신종은 사라진 이카이노를 이렇게 노래했다.

 

보이지 않는 동네 (김신종)

있지만 있지 않은 동네
있는데도 사라져 버린 동네
열차마저 돌아가는 동네
그래도 화장장만은 꼭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아는 곳
하지만 그 동네는 지도에 없네
지도에 없으니 일본이 아니네
일본이 아니니 사라져 버려도 그만이네
아무 상관 없으니 홀가분해지네
누구나 크게 이야기하는 곳
마음놓고 사투리 쓸 수 있는 곳
음식 접시에도 식욕이 있고
사람들 위도 워낙 튼튼해서
주둥이 끝에서부터 발바닥까지
남김없이 먹을 줄 아는 이곳
그들은 오만하게 주장하네
일본의 영양은 자기들이 책임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