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병중감회

검하객 2014. 10. 27. 21:16

 겨우 두세 날 앓으면서도 유난스럽다. 문득 졸수재 조성기(1637~1689)가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 낙마하여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을 곱추처럼 살았던 인물이다. 오늘 그가 남긴 시 500수를 검색해보니, '病' 자가 125차례나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졸수재집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2001년6월 박이정에서 간행하였다. 나름 한 시절을 졸수재에게 바친 셈이다. 오랜만에 시집 번역 파일을 열어보니 번역이 무척이나 성글다. 그래도 한 시절 나의 얼굴이어니 부끄러워 말자. 졸수재가 삼연 형제를 만난 것이 1894년 48세 때이다. 아래 시들은 대개 50 전후한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첫 번째 시는 9월 2일에 지은 것인데, 오늘이 음력으로 9월 4일이다. 그새 세월이 흘러 당시의 졸수재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나는 두어 날 앓아도 이렇게 괴롭건만, 30년 이상을 병객으로 살았던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92九月二日

 

아프니 시절 사물 모두 애틋해           病裏憐時物

국화가 또 꽃소식 보내오누나            黃花又報開

한 가지를 꺾어 와 손에 얹은 채         折來初在手

물끄러미 보다가 술잔에 띄운다         看久更浮杯

혼자 마음 뺏길 뿐 함께 할 이 없어     心賞無人共

詩情만 몰래 절로 솟구친다네            詩情暗自催

도연명 이후 천 년 뒤 오늘                淵明千載後

너를 위해 거듭 거닐어본다               爲爾重徘徊

 

   仲和 김창협의 시에 화운하다

 

숲에 살며 세상을 피한 지 오래          林居久避世

손이 찾아와도 문 아니 연다오           客到不開門

병 앓으며 安身의 법을 얻었고           病得安身法

시에는 도를 살핀 말이 많지요           詩多見道言

돈 없으니 술독은 자주 비지만           無錢樽易罄

매임 적어 번다함 잊고 삽니다           少累境忘繁

가장 사랑하기는 지난 밤 눈에           最愛前宵雪

어둠이 설핏 걷힌 산빛이라오            山光乍斂昏

 

  聖望 李師尙(1656~1725)에게 주다

 

오랜 병에 자리에 누워 있어도           久病常多臥

좋은 철 꽃은 절로 피어나누나           良辰花自開

시절 화초 애틋히 여길 뿐인데           偏憐時物好

그 누가 오랜 벗을 오게 하였나          誰使故人來

시야 서투니 비웃음 꺼려하리만         詩拙寧嫌笑

정 깊으니 술 권하기 마땅하다오        情深合勸杯

풍류는 이 마음에 맞기만 한데           風流聊自適

세상 길에 티끌만 가득 날리네           世路滿飛埃

 

   다시 여러 벗들을 불러 춘회를 잇고 시를 짓다 重邀諸友續春會賦詩

 

반평생 병치레에 사립문을 걸었어도      半生多病掩柴扉

세상 향해 시비곡절 따지기 좋아했네     肯向人間問是非

늙도록 잠시라도 서책 놓지 않았으며     抵老不閒書卷手

봄놀이에 몇 차례나 옷 잡혀 술 샀던가   賞春幾典酒家衣

취하면 미친 듯이 으레 시를 읊조리니    慣從醉後狂吟久

벗들은 술잔 놓고 돌아가지 마시라        莫放樽前好客歸

하물며 따스하고 해사한 봄날이라         況是淸和佳節序

작은 뜰에 꽃들이 향기롭게 피었으니    小園風物正芳菲

 

   중화에게 주다 贈仲和

 

손 적으니 三逕은 잡풀로 우거지고         客少任敎三逕荒

가계가 빈한하니 주머니엔 달랑 한푼      家貧留得一錢囊

병들어 일 없는 늙은이라 하지 마오        休言病叟還閑叟

깨어도 광사에다 취해도 광사라네          不但醒狂是醉狂

시대를 경영해야 참다운 도가 되고         道可經時眞術業

후인을 깨우쳐야 괜찮은 글이라오          書能牖後好文章

그 누가 마음속의 묘리를 알아 듣나        誰人解聽心中妙

높은 곳 오르기 전 시랑이 그립구려        不待登臨憶侍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