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답사 (채만식)
1902년에 태어나 1950년 6월에 죽었으니, 채 50을 살지 못했다. 젊어서는 집안 형편이 괜찮아 일본 유학을 했고, 와세대 대학 시절 축구선수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가산이 급격히 기울면서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죽기 직전 친한 후배 시인에게, 원고지 20권을 보내달라며, 건강이 좋아져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리 맡에 그걸 놓고 죽고 싶어서였단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떠났고, 뒷날 버스 안에서 만난 아들은 아버지를 부인했단다. 해방이 되자 대략 난감한 처지가 되어, <민족의 죄인>이란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도 평생 400편의 글을 지었고, 풍자와 알레고리가 능란했던 작가로 꼽힌다. 그의 친일을 두고도 말이 많은 모양이다. 심지어는 그의 문학에서 항일이 차지하는 부분은 친일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항일을 가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친일 행적을 드러냈다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흠 ~
나는 그저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가? 태어나보니 나라는 망했고 가난했다. 나라가 그에게 해준 것도 없다. 유학을 했고, 기질대로, 먹고 살려 글을 섰다. 그는 가난한 작가였다. 친일을 해서 호의호식이라도 했으면 덜 억울했겠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친일을 읽고, 누군가는 그에게서 풍자를 보고, 누군가는 그에게서 저항을 찾지만, 그는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고, 사회를 뛰어넘지 못한,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슬픈 문사였을 뿐이다. 그는 나의 슬픈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고, 모순과 불합리함으로 그득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탁류>, <태평천하> 등 그의 작품을 언제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