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城의 超然臺
소동파가 왕안석에 밀려 밀주지현으로 온 해는 38세 때인 1074년, 이 <초연대기>를 지은 것은 1075년이다. 濰水는 제성 북쪽을 흐르는 강으로, 濰坊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신이 조참 등과 더불어 제와 초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곳이다. (유수지전) 동파가 진짜 遊於物外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이라는 게 본디 미진하고 불평한 데서 나오는 법이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겠다. 이번 여행에서 등주와 제성에서 소동파의 흔적을 보았다. 나름 인연이 있는 것이니, 대충 번역하여 삶의 한 점 인연으로 올려둔다. 주석이 더 필요한 부분이 있다.
초연대기(超然臺記)
소동파(蘇東坡, 1037~1101)
세상의 사물에는 모두 볼 만한 점이 있다. 볼 만한 점이 있으면 즐길 수 있는 것이니, 꼭 괴기하거나 대단히 크고 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지게미를 먹고 막걸리를 마셔도 취할 수 있고, 나물이나 열매를 먹어도 배부를 수 있다. 이 이치를 미룬다면 내가 어디 간들 즐기지 못하리오.
복을 구하고 화를 마다하는 것은, 복은 기쁨을 주고 화는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무궁한데, 나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사물은 유한하다. 하여 좋고 싫고를 가리는 싸움이 마음속에 어지럽고, 버리고 가지는 선택이 눈앞에 교차하는데, 즐길 수 있는 것은 늘 적고 슬픔을 주는 것들은 언제나 넘쳐나니, 이는 화를 부르고 복을 물리치는 짓이다. 화를 부르고 복을 물리치는 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이리요? 사물이 마음을 가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안에 갇혀 그 밖에서 자유로이 노닐지 못한다. 사물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없으니, 자기 기준으로 보면 크고 높지 않은 것이 없다. 저가 높고 큰 것을 끼고 내 앞에 나타나면, 나는 눈이 아찔해지면서 이랬다저랬다 하게 된다. 이는 작은 틈으로 싸움을 보는 것과 같으니, 무슨 수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를 알겠는가! 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멋대로 일어나 거기 따라 근심과 즐거움이 생기니, 이 어찌 크게 애처롭지 아니한가!
내가 錢塘의 杭州通判으로 있다가 膠西의 密州를 새로 맡아 옮겨오매, 배의 편안함을 버려두고 수로고이 수레와 말을 탔다. 화려한 집을 두고 서까래나 겨우 얹은 집에 살게 되었다. 산수가 수려한 풍관을 등지고 뽕나무와 삼이 우거진 거친 들판으로 나아갔다. 처음에 왔을 때 마침 흉년이 들어 도적은 들에 가득하고 소송은 시끄러워 부엌은 텅 비어 날마다 푸성귀만 먹었다. 사람들은 내가 괴로울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예 온 지 1년 만에 몸엔 살이 오르고 희어지던 머리는 날로 검어졌다. 나는 이 지역 풍속의 순후함을 좋아했고, 아전과 백성들은 나의 소박함을 편안하게 여겼다. 이에 뜰과 밭을 가꾸고, 집과 마당을 정갈하게 하였다. 安丘와 高密의 나무를 잘라 집을 수리하여 하루하루를 잘 지낼 방도를 마련했다.
뜰 북쪽에 성벽에 기대 누대를 쌓은 것이 오래된지라 조금 손을 보고 지붕을 새로 엮었다. 그리고 때로 사람들과 그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뜻을 풀어냈다. 남쪽을 멀리 보면 馬耳山과 常山이 가까운 듯 멀리 있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며 은은하게 보이니, 숨은 군자가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동쪽은 廬山으로 진나라 사람 盧敖가 숨어 살았던 곳이다. 서쪽 먼 곳에는 穆陵關이 성곽처럼 희미하게 보이니, 이곳은 강태공과 제환공의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다. 북쪽으로 濰水를 굽어보며 뜨거운 마음으로 한숨지으니, 회음후 한신의 공적을 생각하는 한편 그 비참한 운명이 슬프기 때문이다.
누대는 높으면서도 편안하고, 그윽하면서도 밝으며,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훈훈했다. 눈이나 비가 내린 아침이나, 바람이 서늘하고 달빛이 고운 저녁이면 나는 이곳에 올랐으며 그때마다 손님과 함께 했다. 텃밭의 푸성귀를 뜯고,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고, 고량주를 마시며, 현미밥을 먹으며 말하곤 했다. “즐겁구나, 자유로워라!”
이때 내 아우 子由가 마침 濟南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시를 지었고, 누대의 이름을 ‘超然’이라 하였다. 내가 어디를 가든 즐기지 못함이 없으니, 사물의 밖에서 매임 없이 노닒을 나타낸 것이다.
凡物皆有可觀. 苟有可觀, 皆有可樂, 非必怪奇偉麗者也. 哺糟啜醨, 皆可以醉;果蔬草木, 皆可以飽. 推此類也, 吾安往而不樂!
夫所爲求褔而辭禍者, 以褔可喜而禍可悲也. 人之所欲無窮, 而物之可以足吾欲者有盡, 美惡之辨戰乎中, 而去取之擇交乎前, 則可樂者常少, 而可悲者常多. 是謂求禍而辭褔. 夫求禍而辭褔, 豈人之情也哉? 物有以蓋之矣.
彼遊於物之內, 而不遊於物之外. 物非有大小也, 自其內而觀之, 未有不高且大者也. 彼挾其高大以臨我, 則我常眩亂反複, 如隙中之觀鬥, 又焉知勝負之所在. 是以美惡橫生, 而憂樂出焉, 可不大哀乎!
餘自錢塘移守膠西, 釋舟楫之安, 而服車馬之勞;去雕牆之美, 而蔽采椽之居;背湖山之觀, 而適桑麻之野. 始至之日, 歲比不登, 盜賊滿野, 獄訟充斥;而齋廚索然, 日食杞菊. 人固疑餘之不樂也
處之期年, 而貌加豐, 發之白者, 日以反黑. 予既樂其風俗之淳, 而其吏民亦安予之拙也. 於是治其園圃, 潔其庭宇, 伐安丘、高密之木, 以修補破敗, 爲苟全之計.
而園之北, 因城以爲台者舊矣, 稍葺而新之. 時相與登覽, 放意肆志焉. 南望馬耳常山, 出沒隱見, 若近若遠, 庶幾有隱君子乎! 而其東則廬山, 秦人盧敖之所從遁也. 西望穆陵, 隱然如城郭, 師尚父、齊桓公之遺烈, 猶有存者. 北俯濰水, 慨然太息, 思淮陰之功, 而吊其不終.
台高而安, 深而明, 夏涼而冬溫. 雨雪之朝, 風月之夕, 予未嘗不在, 客未嘗不從. 擷園蔬, 取池魚, 釀秫酒, 瀹脫粟而食之, 曰:“樂哉遊乎!"
方是時, 予弟子由, 適在濟南, 聞而賦之, 且名其台曰超然, 以見餘之無所往而不樂者, 蓋遊於物之外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