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전신의 기억을 더듬다

검하객 2015. 6. 1. 00:57

   명종실록 19년(1564) 8월 30일 조에는 이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이는 사람됨이 총명 민첩하였고 박학강기(博學强記)하였으며 글도 잘 지어 명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었다. 한 해에 연이어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의 두 시험에 장원으로 뽑히자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다만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첩()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집에서 나가 산사(山寺)를 전전하며 붙여 살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혹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었다.’고 하였다. 그가 읊은 시에 "전신은 바로 김시습인데, 이 생애 다시 가낭선일세. 前身定是金時習, 今世仍爲賈浪仙."

 

낭선은 당나라 승려 시인 賈島의 호이니, 전생에도 승려 금생에도 승려라는 뜻이다. 이이(1536~1584)는 16세(1551)에 어머니를 여읜다. 상기를 마치고 19세 되던 1554년 금강산에 들어가 1년 동안 있다가 나온다. 시를 보면 이이는 이 무렵 번민이 무척 많았던 듯하다. 금강산에서의 1년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이를 공격하는 쪽에는 이를 좋은 빌미로 삼아, 그가 그 사이 승려 생활을 했다고 주장했다. 승려를 했든 말든. 하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어쨌거나 시 두 구절이 실제 이이의 소작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비슷한 기사가 운암잡록에도 실려 있다.  

 

아주 오랜만에 김시습을 다시 만나고 있다. 그는 나의 전신이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내가 전세에 지은 시를 다시 보는 것이다. 번역? 내가 그 시절 한자로 엮은 것을 오늘날 한국어로 다시 짓는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몸으로 새김질하면 상당 부분 기억이 난다. 사마천도, 일연도 다 나의 전신이다. 잃어버린 먼 기억을 하나 하나 되찾는 묘한 설렘이 있다. 하지만 다이어리의 한달 전 기록 상황도 기억나지 않는 게 많듯이, 언제 왜 어떤 상황에서 지은 것인지 가물가물 한 것들도 꽤 있다.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본디 삶이란 다 이해되거나 해석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내 모습이 이랬던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아 기억이 흐릿하다. 양승민 교수는 원래 승려 모습인데, 17세기 후반부터 김시습을 유교의 절의 인물로 포양하면서 초상화가 패랭이를 쓴 유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긴 김시습은 승려의 모습이라야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