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전
백제는 성왕 26년(538년, 웅진 천도는 475년) 봄 수도를 泗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고, 그 지명을 所夫里라고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그 이전 백제는 비공식적으로 扶餘(國)으로 불렸을 것이다. 백제의 왕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고, 하여 백제 왕의 성씨는 扶餘였던 것이다.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백제본기, 온조왕」) 백제가 입국 원년에 처음으로 한 것은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일이다. 고구려의 원래 이름은 卒本扶餘였다. 주몽이 扶餘國(문헌에 따라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뉜다.)에서 탈출하여 나라를 세운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부여라는 국명은 꽤나 유서가 깊은, 조선과 고(구)려와 韓이라는 대표 국명의 자리에 낄 만한 자격을 갖춘 이름인 셈이다.
三國志 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집안이었으니 그 북쪽에 있었다. 읍루는 흑룡강성 목당강시 영안현 일대로 비정된다.(장건장 묘지명에 “忽汗州는 挹婁의 옛 터”라고 했음) 한나라로부터 가까운 지역으로부터 서술했으니, 현도는 선비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 된다. 현도는 요서 지역이 된다. 弱水는 동류 송화강일 가능성이 높다.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산과 언덕, 큰 못이 많았지만 평야 지대라고 했으니, 송화강 남쪽 吉林, 松原, 長春, 하얼빈시 일대의 평원이 된다. 경박호는 포함되지 않았고, 松原市의 차간호수는 영토 안에 있었다. 곡식은 잘 자랐지만, 추운 관계로 과일은 나지 않았다.
其人麤大,(체격) 性彊勇謹厚, 不寇鈔.(성격)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국가체제)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道,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지배체제) 食飮皆用俎豆,(음식문화)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예절)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국가의례)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蔥, 履革鞜. 出國則尙繒繡錦罽, 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 以金銀飾帽.(의복) 譯人傳辭, 皆跪 手據地竊語.(외교문화)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妒 皆殺之. 尤憎妒, 已殺, 屍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형전) 兄死妻嫂 與匈奴同俗.(혼인풍속)
其國善養牲, 出名馬赤玉貂狖美珠. 珠大者如酸棗.(물산)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仗.(군사)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죽음 인식) 作城柵皆員, 有似牢獄.(성곽)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음악 애호)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전쟁) 其死, 夏月皆用冰. 殺人徇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상장 풍속) 魏略曰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引以此爲節.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著布面衣 去環珮 大體與中國相彷彿也』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204) 후한 遼東 襄平 사람. 처음에 玄菟郡吏로 있다가 나중에 도가 있다 하여 천거를 받아 尙書郞에 오르고, 冀州刺史와 遼東太守를 지냈다. 일찍이 襄平令 公孫昭를 살해하고 田韶 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백여 집안을 살육해 고을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나중에 동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고 서쪽으로 烏桓을 침략했으며, 남쪽으로 東萊의 여러 縣을 장악했다. 당시 왕실이 차츰 어지러워졌는데, 자신의 영지가 먼 것을 믿고 자립하여 遼東侯, 平州牧이 되었다. 曹操가 표를 내려 武威將軍과 永寧鄕侯에 임명했다. )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부여의 서쪽에 선비, 남쪽에 고구려가 있었음.) 妻以宗女.(요동의 공손씨는 부여가 선비와 고구려 사이에서 곤란한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음)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孽子麻餘. 位居死 諸加共立麻餘. 牛加兄子名位居, 爲大使, 輕財善施, 國人附之, 歲歲遣使詣京都貢獻. 正始中(240~249), 幽州刺史毋兵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고구려와 한나라의 대결에는 한나라 편을 들다.)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麻餘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其印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也.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魏略曰, 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 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溷中, 豬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 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鱉浮爲橋, 東明得度, 魚鱉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