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紙池에서 낚은 물고기 3마리, 착한 사마리아, 상징, 여운형

검하객 2018. 4. 10. 09:25

 

  ‘착한 사마리아인’은 성경 속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길에 강도를 만나 큰 상처를 입고 길에 버려졌다. 모두 모른 척 지나쳤는데, 당시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 지나다가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남을 도우는 좋은 사람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건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법으로 옮겨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을 돕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착한 사마리아인법’(Good Samaritan Law, 루가의 복음서 10장) 이라고 한다. 이런 법을 두는지 여부는 그 나라의 입법정책에 달려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는 있다. 반면 개인주의적 성격이 짙은 미국, 영국에는 없다. 우리나라에도 없다. --- 법은 ‘바람직한 인간’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가정해야 한다. 남을 돕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곧장 범죄인 취급하는 건 성급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 일에 이익이 있는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남을 도왔다가 오히려 해를 입지는 않을까. 번거로운 일에 말려들지는 않을까.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돕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처벌은 천천히 논의하더라도 우선은 남을 도운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말아야겠다. [도진기, 위태로운 사람을 안 돕고 지나쳐서 생긴 일, 누구의 책임인가 (경향, 4.8)]

 

  고대 그리스어에서 ‘상징(symbolon)’은 ‘악마(diabolos)’의 반대말이다. 전자는 ‘함께 섞다’ 또는 ‘함께 만들다’는 뜻이다. 친구나 연인이 헤어질 때 반지를 반으로 나누어 지녔다가 후에 만났을 때 이를 서로 비교해보는 관습에서 유래했다. 후자는 ‘이간질하다’ 또는 ‘비방하다’는 뜻으로 ‘요한계시록’에서 큰 용, 늙은 뱀이나 사탄으로 묘사된 ‘악마’다. 이런 의미에서 평창은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상징과 갈등·증오를 부추기는 악마와의 싸움이었다. --- 원효는 “정에도, 또 이치에 있어서도 서로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다(於情於理相望不違)”는 중용의 미덕을 지닐 수 있는 인간을 강조했다. 민감한 주제로 인해서 이견과 갈등도 있겠지만 따뜻한 정(情)과 예리한 이(理)의 조화 속에서 남북 정상이 회담을 성과적으로 마무리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65년 전 휴전협정의 조인장이었던 판문점이 화쟁의 상징으로서 우리 겨레를 하루라도 빨리 평화협정을 넘어 통일까지 인도할 수 있기를 멀리서 기원한다. [송두율, 화쟁의 상징, 경향, 4.10]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목표는 한국을 전범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강대국 중 한 국가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친소비에트연방(소련·현 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아야 했다.  미국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공적이지도 않았던 여운형은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지도자가 아니다.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함께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조직하였다. 아울러 그는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김두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 중에는 여운형과 김일성, 김두봉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의 번역본이 있으며, 거기에는 미군정을 비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다.--- 미국의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는 1946년 2월 다시 재현되었다. 버치 중위가 한국에 부임해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정치자문단(Political Advisory Group) 소속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이 결성될 때 미군정은 여운형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민주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특히 ‘친일파’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고, 그들에게 관대한 이승만이 주도하는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여운형을 미군정은 왜 그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붙잡으려 했고, 일부 요원들은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여운형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좌냐 우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서울대 사회학과의 창시자이며 한국 농구계의 산증인인 이상백 교수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정으로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이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미국과 달리 소련이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제정치학자 게디스가 언급한 것처럼 동유럽의 공산정권은 ‘내부로부터 초대받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중국과 베트남 공산정권은 대중적 지지를 통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박태균, <박태균의 비치보고서 2, 미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