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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입당(入唐) ?

검하객 2019. 5. 13. 19:22

 

  원효는 당나라에 갔었나? 이게 무슨 소리, 우리는 보통 원효가 중간에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원효가 당나라에 갔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오고 있다. 100년도 더 전에 와키야 이켄(脇谷僞謙)이 그런 주장을 했고,[新羅元曉法師して至相大師弟子なりや, 六條學報83, 1908] 최근에는 홍재덕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원효대사의 오도설화에 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86, 2014] 이 주장의 근거는 延壽의 宗鏡錄 (961), 贊寧의 高僧傳 (988), 德洪의 林間錄 (1107)이다. 세 기록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延壽, 宗鏡錄 (961)

 

昔有東國元曉法師義相法師, 二人同來唐國尋師, 遇夜宿荒, 止於塚內. 其元曉法師, 因渴思漿, 遂於左側見一泓水, 掬飮甚美. 及至來日觀見, 元是死屍之汁. 當時心惡吐之, 豁然大悟. 乃曰, 我聞佛言, 三界唯心, 萬法唯識, 故知美惡在我, 實非水乎. 遂却返故園, 廣弘至敎.

 

기사대로라면 원효는 당나라에 갔었다.

 

贊寧, 高僧傳 (988), 義湘傳

 

與元曉法師同志西遊, 行至本國海門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 倏於中塗, 遭其苦雨, 遂依道旁土龕間隱身, 所以避飄濕焉. 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 天猶霢霂, 地且泥塗, 尺寸難前, 逗留不進, 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 俄有鬼物爲怪. 曉公歎曰, “前之寓宿, 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 托鬼鄉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卻携囊返國. 湘乃隻影孤征, 誓死無退. 以總章二年(669), 附商船達登州岸. (善妙 일화) 湘乃徑趨長安終南山智儼(602~668)三藏(602~664).

 

⇒  이 기사에 따르면 원효는 당나라에 가지 않았다. 홍재덕이 本國우리나라(중국)’로 번역한 것은 아전인수 격이다. 土龕이나 埏甓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니, 그곳이 중국이라는 해석도 자기 생각에 함몰된 결과이다. 고려나 조선 사람의 시에 원숭이가 나오면, 그곳이 중국이어야 하는가?

 

元曉傳

 

嘗與湘法師入唐, 慕奘三藏慈恩之門, 厥緣既差, 息心遊往.

 

원효 또한 당나라에 갔던 것이 된다. 다만 慕奘三藏慈恩之門삼장을 사모하여 자은사문인이 되었다.”로 번역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구절은 삼장법사 현장이 있는 자은사의 산문을 흠모하였다.”로 풀어야 한다.

 

德洪, 林間錄 (1107)

 

唐僧元曉者, 海東人. 初航海而至, 將訪道於名山. 獨行荒陂, 夜宿塚間. 渴甚, 引手掬於穴中, 得泉甘凉. 黎明視之, 髑髏也. 大惡之, 盡欲嘔去. 忽猛省大嘆曰,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髑髏不二. 如來大師曰, “三界唯心”, 豈欺我哉. 遂不復求師還海東.

 

또한 당나라에 갔었던 것이 된다.

 

 10~12세기에 중국에서 편찬된 세 종 불교 문헌의 네 가지 기사 중, 셋에서 원효의 입당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곳도 중국 어디일 수밖에 없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효가 당나라에 다녀왔다고 한들 무슨 흠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효가 당나라에서 스승을 모시고 구법 수행 활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홍재덕의 논문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재덕은 기존 연구자들을 거듭거듭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부정과 비판이 비판이 앞서고 논증은 부족하다. (원론적인 비판의 되풀이) 또 자기 주장에 함몰되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隻을 雙으로 읽는다거나 園을 國으로 표기하는 등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비판에 마음을 쏟다가 생긴 결과이다.

 

  흥분하게 되면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자잘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공격에 의욕이 앞서게 되면 자신에게 허점이 생기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논문에서는 화려한 공격보다 빈틈 없는 수비가 더 중요하다. 홍재덕의 논문을 읽고,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