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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들마을 (어머니의 흔적)

검하객 2022. 2. 21. 00:46

  생극에 간 김에 금왕의 윗가래들마을(상유촌리)에 들렀다. 한국전쟁 당시 외가에서 피난갔던 곳이다. 당시 큰이모가 시집간 동네였다는 게 피난처로 설정한 이유였다. 당시 어머니 형제는 일곱이었고, 외할머니는 여덟째를 임신중이었는데, 그만 이 와중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막내 이모 집에 들렀다. 이제 어머니의 유일하게 남은 친혈육이다. 마침 외삼촌(이복)이 도착하여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큰누이를 가래들누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외할머니가 소달구지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이모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섣달 26일이 돌아가셨고, 그 상태로 포기실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10살, 이모가 8살 때 일이다. 가래들마을은 없어지고 있었다. 이 일대에 산업복합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가래들은 600여 년 한양조씨의 세거지였다고 한다. 장수하고 돌아가신, 끼니마다 소주 1잔을 반주로 드시던, 화양리 중랑천 가에 사시던 이모부도 조씨였다. 어머니의 흔적이란 게 얼마 되지 않는다. 가래들은 소녓 적 어머니가 엄마를 잃은 곳이다. 그런데 그 마을조차 지금은 사라지고 있다. 대체 이 세상에 남는 건 무엇일까?  

 

  * 새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여러 곳에 나들목이 생겼는데, 나들목마다 쓰레기장이다. 음성군청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나? 알고 있으면서 방치하고 있나?

 

  돌아와 찾아보니 <음성자치신문> 에 마을 관련 기사가 있어 가져와 올려둔다. 

(http://www.usjachi.com/news/articleView.html?idxno=18538)

 

‘자린고비 수박’으로 거듭나는 소문난 ‘충효마을’ (안창규 기자, 2015. 07. 09) 13:25

금왕읍 유촌리-가래들
한양 조 씨가 대대로 모여 살아온 터전
조유한, 민발 장군 등 효자, 충신 배출

▲ 가래들 마을전경. 3년 전 평택~제천고속도로 개통과 21번 국도 확장 등으로 마을이 4분할 됐지만 동네 안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 조선조 1등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을 배향한

3년 전 동서로 평택~제천고속도로, 남북으로 이천-진천 간 21번 국도가 개통되면서 금왕읍 유촌리는 4분할됐다. 마을 아래로 흐르는 한천이 유포리와 경계를 이루고, 한천 주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형성돼 있다. 아래가래들을 지난 한천은 남쪽의 진천군으로 흘러 미호천에 합류된다.

마을 유래비에 의하면, 본래 충주군 금목면(金目面) 지역으로 가래버들(먹버들)이 많아 가래들 혹은 유촌이라 하였다고 하나, 마을의 노인회장은 조선조 남이장군 시대에 '가래뭉지'라는 스님이 지금의 윗가래들(절골)에 사찰을 짓기 위하여 장호원에서 주춧돌로 쓸 큰 돌을 옮기는 중 걸빵이 끊어졌는데 그 스님의 이름에서 가래들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최근까지도 가래버들 숲이 마을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경로당을 지으면서 모두 잘라내었다고 한다. 행정적으로는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와우리(臥牛里)·촌서리(村西里)·촌동리(村東里)·한삼리(閑三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유촌리라하여 금왕면에 편입되었다.

유촌리는 윗가래들, 아래가래들, 과수원거리, 머우럭지, 광정이, 구렁지 등 크고 작은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있다. 전체 70여 가구 중 55가구 대부분의 주민이 윗가래들과 아래가래들에 거주한다.

한양 조 씨 세거마을

유촌리는 한양 조 씨의 세거마을이다. 고려 때 첨의중서사인(僉議中書舍人)을 지낸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조경과 조도흥을 입향조로 한다. 한양 조 씨 가문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2명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조온(趙溫)이다.

조인옥의 후손인 조경(趙經)이 임진왜란 후 금왕읍 유촌리에 와서 세거하였고, 또 다른 일파인 조도흥은 음성읍 용산리 생골에 와서 세거하였다. 한양 조 씨는 금왕읍 삼봉리와 유촌리 일대에 40여 호가 살고 있고, 음성읍 용산리 생골에도 20여 호 살고 있다. 한양 조 씨 문중의 역사적인 인물 중 두 사람, 조인옥과 조륵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조인옥의 형은 이성계의 자부(매형)이었다. 1387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위화도에 있을 당시 회군할 것을 건의하였다. 회군을 한 뒤에는 구세력을 숙청하는 작업에 가담하면서 바로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만류하였다. 1390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뜻을 모아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해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우면서 중추원부사에 올랐으며,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유촌리 마을 안에 조인옥을 배향한 충정사(忠靖祠)가 있다.

'자린고비 조륵 선행 유래비'

다른 한사람은 '자린고비'로 널리 알려진 조륵. 그는 이웃 금왕읍 삼봉리 출신으로 가족과 식사를 하며 천정에 메달아 놓은 굴비를 두번 보면 “짜니 물 마셔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일화 이외에도 다른 여러 이야기가 있다.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자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저 장도둑 놈 잡아라”하고 외치며 단양 장벽루까지 파리를 쫓아갔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장만하였는데 부채가 닳을까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머리만 흔들었다고 하니 상상을 뛰어넘는 근검절약이다.

그런 그도 그의 환갑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게 아니오. 여러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재산을 모았소. 환갑날인 오늘 부로 나의 전 재산을 어려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겠소” 이후, 그는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慈仁考碑)'라고 불리었다는 일화이다.

조륵의 출생지는 금왕읍 삼봉리이고 그곳에 생가도 있지만, 유촌리가 한양 조 씨 세거마을이어서 마을 어귀에 “자린고비 조륵 선생 유래비”가 자리하고 있다. 유촌리 70여 가구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의 가구가 농사를 짓고, 그 중 수박 시설하우스도 80여 동이 있는데 '자린고비'를 상표로 사용하고 있다.

유촌리에도 젊은 세대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거주하고 있어 주민 평균연령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음성읍보다 주민 수가 많은 금왕읍에 속해 있어 초중고생이 6~8명 정도에 전체 70여 가구, 주민 100여 명 중 절반이 농사, 과수,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사는 수박, 벼농사와 인삼, 참깨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매년 12월25일의 대동계는 다른 마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대신 정월대보름 때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성대히 치르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마을의 큰 행사이다. 마을 경로당은 1년 내내 개방을 한다. 매년 12월부터 3월까지 읍장 등 군내 인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고, 학생들을 위한 동아리 · 학습방으로도 활용한다.

효자, 효부, 충신 등 배출

마을입구에는 '충효마을'이라는 마을별칭이 붙어있다. 조유한 효자정문과 수양대군이 명나라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갈 때 동행하였던 민발 장군의 묘가 마을에 있기에 오래전부터 그리 불리어왔다. 마을 주민 간의 단합과 화목은 금왕읍 내에서 손꼽힐 정도이다.

마을 주변에 자리한 22개 개별공장의 여파가 수시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정적을 깬다. 마을 입구에는 대형차들이 마을 안으로의 진입을 막는 마치 큰 사찰의 솟대처럼 생긴 우람하고 키 큰 쇠기둥이 양쪽에 서있다. 인근의 공장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면 마을 안으로 진입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을 앞 운치 있는 가로수 산책로도 이제는 하루 수백 대 오가는 대형차량의 위협으로 걷기 두려운 길이 되었다. 자치단체에서 추진하였던, 또는 허가를 내주었던 산업화 정책에 의한 산업시설이 마을 주변에 몰려들었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은 취업 등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받는 것이 없다. 여기에 마을 개천에서 물고기가 사라지는 등 환경오염이 가중돼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