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독레미, 소설과 역사

검하객 2013. 6. 28. 01:50

 "레미제라블" 1부는 팡틴이다. 그중의 1절은 <올바른 사람>이다. 디미엘 신부의 이야기다. 2절은 <추락>이다. 장발쟝이 디미엘 신부를 만나 19년간 쌓아온 세상과 사람에 대한 냉혹한 증오가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아직 팡틴은 나오지 않았다. 3장은 <1817년에>이다. 서사는 1815년에서 시작했으니 2년 뒤의 이야기다. 3장의 1절은 '1817년'이다. 이 절은 1817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소소한 사실이나 사건들을 무려 11페이지에 걸쳐 나열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을 이렇게 맺었다.

 

  이상은 오늘날에는 잊혀 버렸지만 1817년이라는 해와 관련, 뒤죽박죽 떠오르는 일들이다. 역사는 이 모든 특수한 사실들을 거의 다 무시하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한없이 많은 것이 역사에 밀려들 테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세세한 일들을 사람들은 사소한 일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데(인류에 사소한 일은 없고 식물에 사소한 잎은 없다.) 그것들은 모두 유용하다. 시대의 모습은 연년의 표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사건들을 자의적으로 취사선택, 해석구성한 뒤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보통 권력과 지식이 결탁하여 만들어내며, 공신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거기에 들지 않은 것들은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역사(기술)처럼 폭력적인 것은 없다. 며칠전 몇몇 인문학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레미제라블"의 훌륭함을 이야기했더니, 대뜸 역사학 전공 교수가 말한다. "프랑스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그가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사가(또는 역사 연구자)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쳐 순간 폭력적 독선에 빠진 것이다.

 

  이제 팡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는 고아 출신으로, 부유한 대학생과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버려지고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코제트이다. 어떠한 프랑스사도 대혁명 직후 장발쟝이나 팡틴이나 코제트 같은 '불쌍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소설의 미덕이 있다면 그건 역사보다 덜 위선적이고 덜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그 분에게 이 구절을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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