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 유숙자, 민음사, 2010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집 책꽃이에 『아더왕 이야기』와 『원탁의 기사』가, 중학생 무렵에는 『산소리』가 꽂혀 있던 기억이 분명하다. 모두 세로 조판 책이었다. 이중 앞의 두 책은 읽어본 듯하고, 뒤의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책들은 진작 없어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7년이다. 남은 것은 나의 희미한 기억 뿐! 제주에 가면서 가방에 『설국』을 넣었고, 돌아올 때 제주공항에서 처음 꺼냈고, 비행기 안에서 몇 쪽을 읽었다가, 개강을 하루 앞둔 어제(8월 30일) 오후 졸음과 사투하면서 모두 읽었다. 두 번이나 읽었는데 기억이 희미한 이유를 알겠다. 극도로 정제된, 수없이 갈고 닦은 문장 때문이다. 하여 매우 함축적이고 서정적이기에, 한 단어 한 문장을 공들여 읽지 않으면 유리 위에서처럼 미끌어질 뿐이다. 이런 걸 일본적이라고 해야 하나,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고 투명하며, 허무할 정도로 비현실의 미감에 집착한다. 인공미의 극치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2014년 8월 말, 나는 문득 설국을 여행했다. 소설에서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을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낸 부분도 있다. 예컨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의 그것과는 거리가 먼, 덧붙인 것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도, 소설에서는 흐릿하다. 초록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국경은 군마현(群馬縣)과 니가타(新潟縣)의 접경, 터널은 시미즈(淸水)터널이다. 터널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환상을 가르는 경계이다. 소설의 모든 사건은 후자에서 펼쳐진다. 굳이 견주자면 무진과 같은 곳이라고 할까. 거울 속 - 사실은 기차의 객창 - 은 또 다른 나가타현이다. 차창에 어린 미지의 여인에 대한 묘사, 비현실감이 강하다. 요코(葉子)라는 이름은 역장과의 대화로 알게 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를 읽지는 않았을 터인데. 부모의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면서, 상상만으로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는 시마무라. 고마코는 일기를 써왔다. 또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고 따라서 잡기장이 벌써 열 권이나 되었다. 이 일기와 잡기장은 고마코의 비밀이자, 그녀가 자아내는 신비감의 근원이다. 거기 그녀의 생애가 담겨 있다.
발레리와 알랭을 비롯, 러시아 무용이 한창이던 무렵에 프랑스 문인들이 쓴 무용론을 시마무라는 번역하고 있었다. 적은 부수의 호화본으로 자비 출판할 예정이다. 지금의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책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고 해도 좋다. 자신이 하는 일로 스스로를 냉소한다는 것은 어리광을 부리는 즐거움이기도 하리라. 바로 이런 데서 가의 슬픈 몽환의 세계가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마무라는 처음부터 고마코와 요코를 투명하고 신비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들의 고달픈 인생 내력은 끝까지 봉인된 채로 남는다. 시마무라는 일정한 직업 없이 여행을 다니고, 직접 보지도 않은 여행에 관한 글을 쓴다. 그의 삶에는 현실감이 없다. 이러한 비현실감의 눈은, 두 여인을 몽환적인 존재로 빚어낸다. 이들은 눈의 세계, 차창이라는 거울 속의 존재들이다.
시마무라의 허무적 탐미감
그는 곤충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가을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그의 방 다다미 위에는 거의 날마다 죽어가는 벌레들이 있었다. 날개가 단단한 벌레는 한번 뒤집히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벌은 조금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걷다가 쓰러졌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의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 장 크기의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시마무라는 죽은 곤충들을 버리려 손가락으로 주우며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문득 떠올리기도 했다.
“당신은 절 좋은 여자라고 하셨죠? 떠날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 “울었어요. 집에 돌아가서도 울었어요. 헤어지는 게 무서워요. 하지만 어서 가버려요. 그 말 듣고 울었던 걸 잊진 않을 테니까.”
⇒ 떠날 생각에 그런 말을 했고, 고마코는 그 사실을 직감했다. 고마코, 나는 문득 이 여인을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