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을비 속 수락산행

검하객 2015. 11. 14. 22:08

  며칠 전 김시습의 행적을 살피다가 그가 10년 살았다는 수락산의 거처가 문득 궁금해졌다. 조선시대 문사들은 수락산을 유람하거나 멀리 바라보면 으레 김시습을 떠올리곤 했다. 17세기 후반 수락산 서쪽 자락에 물러나 살았던 박세당은 청절사를 짓고 그 영정을 모셨다. 청절사 터는 지금의 석림사 자리이다. 하지만 여러 전승을 종합하면 김시습이 살았던 곳은  그 너머인 산의 동쪽면이 틀림없다.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김시습의 암자가 있던 자리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장소는 금류폭포와 내원암 위로 좁혀지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금요일, 마침 다른 약속이 없어 김시습이 지었다는 폭천정사 터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전날부터 내린 비가 그치질 않는다. 폭우가 아닌 이상에야 계획을 멈출 까닭이 없다. 옥류폭포 근처에 차를 세우고 우산을 든 채 걷기 시작하여 내원암 위 200여m 지점까지 올랐는데, 4시 약속도 있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 그쯤에서 발길을 돌렸다. 금류폭포 아래의 휴게소에는, 2013년 고소설학회에서 걸어놓은 폭천정사 터 표목이 걸려있다. 매월당집 권 10, <유관동록>에는 "門前飛瀑"이라는 7언 절구가 실려있다. 앞 두 구는 이렇다. "한 줄기 차운 시내 먼 산서 떨어지니, 언제나 문앞에는  옥구슬이 날린다오. 一道寒泉落遠峯, 對門常噴玉玲瓏." 진짜 김시습이 거기 살았다면 이 시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 다만 문 앞의 날리는 폭포가 금류폭포라는 외적 증거가 없고, 내원암 위쪽에 터가 있다는 조선 문인들의 증언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내원암은 최소한 1600년 즈음에도 있었으며, 그 뒤에는 聖殿이나 性殿으로도 불렸는데 그것이 안내판에 씌어진 순조의 탄생 사연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더 따져볼 일이다. 1472년부터 10년을 수락산에서 지낸 김시습은 1483년 49세에 관동 여행을 떠난다. 김시습은 꽤나 깊숙한 곳에 살았던 모양이다. 남효온은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은 경험을 시로 남기고 있다. 그 시절 도성에서 이곳까지는 어디로 해서 왔을까? 내려오다가 <생수식당>에서 된장찌개 한 그릇을 먹었는데 무척 맛있다. 주인은 수락산 이도사인데, 수행자이다.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일어섰다. 6살에 어머니가 재가한 사연, 수행중 늦가을 숲을 보면 알지 못할 설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는 말이 나그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뒷날 다시 찾기로 했다. 어쩌면 이도사님이 김시습의 집터를 찾아줄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다시 날을 잡아 석림사 쪽에서 올라 산을 넘고 생수식당에서 밥을 먹어야지. 

 

  

   

            금류폭포 오르는 길 계곡                                                     금류폭포                                                               내원암 삼성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