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승과 술의 추억

검하객 2015. 11. 22. 23:29

 스승은 꽤나 괜찮은 주객(酒客)이었지. 잔을 오래 비워두지 않았고, 술이 차면 기다리게 하지 않았지. 잔을 들 땐 머뭇거리지 않았고, 잔을 기울일 땐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며, 술이 혀를 적시면 손님을 맞는 예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접빈과 교우의 도가 절로 풍겨나왔네. 옛날 어떤 이는 청탁을 가리지 않았다지만 맑은 것이 아니면 대접을 아니 하였고, 사정 따라 순과 독을 가릴 법도 했으나 독한 것과의 의리를 버리지 않았네. 마장갈비에선 내장탕에 반주를 했고, 학위논문 심사가 끝나면 인사동 선천집을 찾았는데 술은 둘째치고 옛글에서나 보던 그 고을 이름에 먼저 취했지. 해밑이면 연희동 중국원 원형 식탁에서  백주를 주고받았고, 정초면 구산동 옛집에서 사모님이 내오던 소고기 버섯 무침이 안주로 좋았더라. 괴산군 감물면 목도교 아래 달래내 가에는 어부가 꾸려가는 목도민물매운탕집이 있는데, 뜨겁고 매운 국물에 잡고기 흰 살 한 점을 올려놓고는 오강의 농어 맛이라며 무릎을 쳤지. 문앞에 낙엽이 쌓이고 비가 내리는 늦가을 밤, 나는 문득 그 집들을 차례대로 찾아가면서 스승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네. 그 시절 못한 말은 지금도 다 못하고, 그 시절 어근버근하던 것은 지금도 껄끄러운 채, 어색하면서 친숙하게, 편안하면서 껄끄럽게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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